아포리즘의 덫 : 남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
공부는 카페에서 해야 잘 된다. 별다방이나 콩다방에서 사과공책 열어 놓고 공부를 하는 맛이 있다. 아마도 그 맛은, 인테리어 잘 된 카페에서 비츠 헤드셋을 장착하고 사과공책을 열어 무엇인가에 골똘히 열중하고 있는 밤새도록 정주행 한 드라마 속 연예인의 모습을 재현하며 주변의 시선을 느끼는 맛일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되었다는 환상에 빠지는 맛일 것이다. 카페 있는 사람들이 알아봐 주기를 바라지만 사실 아무도 관심 없다. 괜히 혼자서 주변의식하고 남의 시선에 비칠 모습을 상상한다. 노트북의 화면과 자판은 어느 회사든 거의 비슷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성을 소비한다면서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로고에 신경 쓴다. 노트북 열면 로고는 남의 눈에만 보인다. 덮었을 때도 가방에 들어가 있거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므로 내가 로고를 볼 일은 책상에 올려놓고 화면을 열기 직전 몇 초가 전부다. OS도 기기의 성능에 최적화된 것을 사용하지 않고 스스로 '윈도' 깔아서 쓴다. 보급형도 가격대가 상당한 기종이다. 그렇게 보면 소비자들은 껍데기에 그 많은 돈을 갖다 바친다. 나도 스마트폰이며, 태블릿이며 모두 사용하고 있기에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노트북은 아닌 것 같아서 아직 보류 중이다. 하지만 경제사정만 허락했다면 이미 구입했을 거다. 그만큼 감성은 우리 삶을 많이 지배한다. 그 감성은 참으로 비겁하다. 운동도 안 하고 근육질로 보이고 싶고, 세수도 안 하면서 꿀피부로 보이고 싶다. 집에서 댕굴댕굴 구르고 있으면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고, 등받이로 쓰려고 소파를 산다.
공부하라며 부모님이 초등학생 때 책상을 사주셨다. 내 방도 따로 내어 주셨다. 하지만 우리 네 가족은 모두 안방 TV앞에서 생활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시험성적이 전교순위로 나오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내 방 책상 앞에서 하는 딴짓이 제일 재밌다. 아! 책상 앞에 앉기 전 방청소와 책장 정리 시간은 빼고다. 새로 산 문구용품 성능을 테스트하며 시간을 보내고, 공부 계획 짜면서 보내고, 공부도 라디오 들으며 했다. 부모님은 그 시간 전부 열심히 공부했다고 철석같이 믿으셨을 거다. 겉으로 보기에는 방에 틀어박혀 책상에 앉아있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매일 같이 책상에 앉아서 포스트잇에 철학자들의 명언을 적어 붙였다. 각오와 명언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 여기저기에 붙이고, A4지로 출력한 명언은 코팅지로 코팅하고... 그렇게 붙여놓으면 그런 사람이... 그런 생활을 하는... 그런 의지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그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봤으면 석학이 되었을 거다. 탕수육은 부먹, 찍먹 고민할 시간에 한 개라도 더 먹어야 한다. 그때 써 붙였던 명언대로 살았더라면 뭐가 돼도 됐을 거다. 써 붙였던 명언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저 내가 써붙여 놓은 명언과 각오대로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나이가 들어가며 포스트잇은 냉장고로 세력을 넓혔다. 포스트잇뿐만 아니라 식단표와 신문 스크랩이라는 지원군을 등에 업고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신자에게 냉장고 앞은 텔레비전 다음으로 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덩달아 아기자기한 자석 병따개와 캐릭터 클립이 늘어났다. 버킷리스트는 식당 메뉴판 같이 항상 붙어있다.
많은 철학자들이나 성인들의 말을 짜깁기한 듯한 아포리즘을 내세운 책들도 하나 가득이다. 사실 도대체 뭔 말인지 너무 밑도 끝도 없어서 공감은커녕 멍 때리면서 읽다 보면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감은 있는데 뭘 읽었는지 허무할 때가 많다. 분명 '아! 옳은 말이야!'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훌륭한 말이야'라는 한마디가 감상평 전부가 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으나, 아무 소용없는... 땅 속에 묻혀있는 유물 같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생일선물로 이 책을 선물하며 '힘들 때 읽고 힘이 되기를..'이라고 정성스럽게 포스트잇에 적어 붙인다. 이건 무슨 개소린지... 중고등학생 때 '세상을 보는 지혜'이던가? 그 책 생일선물로 10권 넘게 샀다. 반대로 선물로 받으면 포장을 뜯으며 기대하던 마음은 '나랑 싸우자는 건가?'라는 원망으로 바뀐다. 갱지 같은 누리끼리한 그 표지는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다. 생일에 여자친구에게 받은 음악 CD 다음으로 최악의 선물이다. 주는 선물은 괜찮고, 받는 선물은 안 되는 빈 껍데기 같다는 후회에 비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 삶과 행복은 껍데기로 포장할 수 없다. 책상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속의 명언들과 각오는 글자일 뿐이다. 비겁하게 그 뒤에 숨어있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직접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런 덫에 걸리지도 말고, 그런 덫을 놓지도 말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