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으면 일단 벗어나 봐야 하던데...

그 안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지면 골병들지만 배우는 건 있더라.

by 철없는박영감

여름방학이면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 정도 큰집에 맡겨지곤 했다. 부모님이 결혼도 늦은 나이에 했고, 결혼한 지 7년 가까이 아이가 안 들어서다가, 내가 태어나고, 2년 터울로 동생이 태어났다. 그래서 큰집에 누나, 형들은 나와 띠동갑이었다. 이미 성인이거나 고등학생이었는데, 어린아이들 우는 소리, 싸우는 소리, 생떼 부리는 소리가 시끄러웠겠지만, 그래도 어린아이 소리가 새로운 활력을 주었는지 어른들의 포용력으로 잘 받아주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어른이나 형, 누나 없이 혼자서 밖에 나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않았고 하루종일 집안에서 동생과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 큰집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큰아버지는 점방이라고 부르는 작은 방에서 항상 가게를 보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곳에서 혼자 식사를 하셨는데 우리 형제가 있을 때는 식구가 되어, 식사시간이면 점방에서 큰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가는 시기 정도였던 것 같다.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 세상이 조금 더 넓어지던 때이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모르는 동네를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는데 눈앞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풍경들에 매료되어 페달을 밟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딘지 모르는 곳에 있었다. '왼쪽, 오른쪽' 분명히 오면서 어떤 코너에서 어느 방향으로 틀었는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중간에 어느 한 부분에서 기억이 잘못되었는지 낯선 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어렸지만 처음에는 당황스럽지 않았다. 저 앞에 코너만 돌면 다시 익숙한 거리 풍경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탐험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저 코너만 돌면...'을 몇 번 실패하다 보니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고 막다른 길에 들어섰을 때는 오줌 쌀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왔다. 배도 고프고 힘도 빠지고 덜컥 겁이 났다. 지금이야 스마트 폰으로 길을 찾거나, 지도 앱을 켜면 되지만, 그때는 믿을 것이라고는 체력과 그나마 빨리 많이 갈 수 있는 자전거뿐이었다. 그렇게 미로 같은 골목길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어느 순간 큰 길이 나왔다. 그제야 내 현 위치가 파악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 지도가 그려졌다. 낯설고 불안한 미지의 세계가 순식간에 낯익고 편안한 포근한 세계로 바뀌었다. 그런 기억이 있어서인지 지금은 어디를 가도 절대 길은 안 잃어버린다. 주변 반경 1km 정도 간판이나 가게, 혹은 특이한 건물들로 항상 현 위치를 파악해 놓는다. 덕분에 길눈이 밝아졌다.


골프를 치면서 언제부턴가 이상하게 드라이버가 안 맞기 시작했다. 원래도 못 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습장에서건, 필드에서건 아예 공을 맞히지도 못했다. 아이언은 쭉쭉 잘 나가고, 어프로치도 잘 붙는데 드라이버만 잡으면 치기 전부터 겁을 냈다. 골퍼들이 흔히 'YIPS'라고 하는 상태였는데, (사실 프로 선수들이 불안함과 공포감으로 평소 잘하던 동작도 못하게 되는 현상인데 나는 워낙 못 쳤기 때문에 YIPS라고 하는 게 민망하긴 하다.) 티샷존에 대한 공포가 어마어마했다. 티를 꽂으면서도 '당연히 안 맞을 거야'라는 생각이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잘해보겠다는 투지도 없어지고,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미 포기를 한 상태가 됐다. 연습을 많이 해서 이겨내 보려고도 했고, 못 치더라도 무조건 필드에 따라가서 돈을 잃더라도 경험을 쌓으려고도 했다. 연습장을 바꿔보기도 하고, 스윙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준다는 GDR 레슨을 끊어보기 했다. 하지만 점점 허리도 안 좋아지고, 새끼손가락은 아직도 트리거 증후군으로 제대로 굽혀지지 않는다. 몸은 한쪽으로 틀어져서 짝짝이가 되면서 온몸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고, 스윙폼을 교정한다고 버티다가 왼쪽 무릎과 발목은 완전히 박살 나기 일보직전이다. 허리디스크도 생기고, 몸도 안 좋아져서 완전히 골프를 접고, 그렇게 골프에 대한 고민을 완전히 내려놓고, 까맣게 잊고 몇 개월을 살다가 갑자기 형광등 불 들어오듯이 뭔가 깨달음이 번쩍 찾아왔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번쩍 찾아왔다. 무의식 속에서 계속 고민했었나라는 의심을 할 정도였다. 그냥 우연히 지나가면서 본 골프스윙 팔로우 사진이었다. '아 저런 포즈로 끝내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뒤죽박죽이던 드라이버 스윙 메커니즘이 착착착 짜 맞춰졌다. 그동안 엉뚱한 데서 원인을 찾고 있었다. 옆에서 안타깝다고 조언해 주던 말은 사실 X소리에 가까웠다. 그런 걸 또 조언해 준 마음이 고마워서 그대로 시도하겠다고 몸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지금은 연습을 안 해서 거리는 안 나지만 공은 잘 맞춘다. 골프의 재미가 세게 쳐서 멀리 보내고 스코어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골프채에 공이 정타로 잘 맞았을 때의 짜릿한 그 손맛인데, 이제는 진짜 재미를 찾아가고 있다. 미스가 없어지니까 스코어는 당연히 줄었다.


한 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에 사람들이 극대노 한 적이 있다. '청춘이면 아파야 한다.'로 잘못 알아들었다. 나도 극대노 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희대의 망언이라고 평했었다. 그때는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것이 멋있어 보였고, 아프기 싫다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아픔을 느끼면 빨리 경로를 수정하거나 큰길로 나와서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것을... 길을 잃고 헤매기 전에 이정표를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청춘은 아픔을 민감하게 느끼는 시기라는 것을 말한다. 아픔 속에서 부딪히고,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골병이 들겠지만, 분명히 배우는 것이 있다. 청춘은 아프다는 것을 알면 수정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있다. 이제 청춘의 중간을 지나면서 번쩍 깨달았다. 가진 게 별로 없을 때 실패하면 금방 복구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와버리면 힘들고 아플 때, 포기하기에도, 계속 가기에도 엄청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다. 그러니 아픈 곳에서 계속 원인을 찾으며 틀린 원인에 시간 낭비, 돈 낭비, 건강 낭비를 하기 전에,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체력 소모하고 두려움에 정신줄 놓기 전에, 일단 벗어나서 큰길로 빠지고 빨리 아프다고 말하고 안 아픈 곳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청춘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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