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대체하는 심급으로서 편집증

에크리 <정신병의 모든 가능한 치료에 전제가 ~>를 읽고

by 숨듣다


1.프로이트와 나르시시즘

(원문출처 : https://www.projekt-gutenberg.org/freud/kleine2/Kapitel9.html)

과대망상은 외부 대상에 향해 있던 리비도의 대가로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외부 세계로 향했던 리비도가 자아(자기 자신)로 되돌아오면서, 나르시시즘이라 불릴 수 있는 심리 상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과대망상 그 자체는 새로운 창조물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 그것은 이미 존재하던 상태의 확대와 명확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는 외부 대상에 대한 리비도적 애착이 통합되면서 생겨난 나르시시즘을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간주해야 하며, 이는 다양한 영향들로 인해 흐려졌던 ‘1차적 나르시시즘’ 위에 구축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이로 인해 우리는 자아에 리비도가 최초로 집중된 원초적 상태를 상정하게 되며,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리비도가 외부 대상으로 전이된다고 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아에 머무는 리비도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리비도와 외부 대상에 부착되는 리비도의 관계는, 마치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이 자신의 몸에서 가짜 발(위족)을 뻗는 것과 유사하다. - 나르시시즘 입문 中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번역상의 오류 가능성이란, 상기 볼트체로 강조된 부분을 프로이트의 2차 정신지형학적 용어 번역에 따라 상기 텍스트의 Ich를 '자아'로 알부러 잘못 번역한 사실이다[1]. 프로이트의 텍스트 원문들을 다시 읽으며 명백해진 점이 있다면,─라깡의 말대로 텍스트를 말 그대로(à la lettre) 바라보는 오류를 자유롭게 범할 수 있다면─, 여기서 '자아'의 원문 표현은 사실 나(Ich), 곧 주체로 다시 번역될 수 있다[2]. 현상학적 논리를 배제하고 전개되는 프로이트의 텍스트에서 발견되는 주체(혹은 나, 혹은 자아)-리비도(Ichlibido)와 객체-리비도(Objektlibido)의 구분이 그 근거다. 또한 리비도와 주체-관심(Ichinteresse)은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며, 구분되지 않는다(나르시시즘 입문 中)는 대목 이하로 무수히 등장하는 주체-Ich에 대한 언급은, 정신분석의 대전제인 무의식의 인정을 배제하지 않고서야, (라깡의 말대로) 단지 편협하게만 모든 책임을 '자아'의 저항에 떠넘기는 현대 정신분석의 주류 흐름의 오독 가능성을 명백히 가리키고 있다.


물론 두 개념의 구분, 즉 “주체(Ich, 자아) 리비도”와 “객체 리비도”라는 개념의 가치는, 신경증 및 정신병의 세부적인 특징들을 분석한 결과로 도출되었다는 점에 있다. (나르시시즘 입문 中)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할 전제는 (라깡이 메를로 퐁티를 자주 언급하며 일부 받아들인) 현상학적 의미에서 “이 '객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가?”이다. 어째서 자아에 집중된 리비도가 일정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외부 대상으로 확장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는가?(나르시시즘 입문 中) 분명 이 객체란 주체의 심리적 경제 내에 위치한 무엇일텐데, 단지 철학사적 뒤쳐짐으로 이를 지나치기엔 아쉽다.


프로이트는 글의 후반부에서 주체이상(혹은 자아이상 : Ideal-Ich)으로 소개되는 개념으로 라깡적 설명을 뒷받침하며 해명을 마무리한다. 주체이상은 단지 개인의 이상일 뿐만 아니라, 가족·계층·국가와 같은 사회적 집단의 공동 이상이기도 하다. 이 이상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할 경우, 그에 묶여 있던 동성애적 리비도는 불안정한 상태로 해방되며, 이는 곧 죄책감(Schuldbewußtsein) 또는 사회적 불안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죄책감은 원래 부모의 처벌에 대한 공포, 보다 정확히는 부모의 사랑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고, 자라나며 이는 사회 전체(동료 집단)의 평가로 전이된다.


주체이상이 부재한 사람의 경우, 그 충동은 변형되지 않은 형태로 성격 내에 유입되어 성도착(perversion)으로 나타난다고 언급한 대목은 대타자 개념과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감시자’의 기원은 부모의 비판적 시선, 다시 말해 양육 과정에서 내면화된 목소리, 즉 주체이상에 있다. 또한, 리비도 충동은 개인의 문화적·윤리적 가치관과 충돌할 때, 병리적 억압의 운명을 겪는다. 따라서 주체이상이란 억압의 근본적 전제조건이고, (나르시시즘 입문 中) 억압이란 주체적 삷보단 타자성을 향한 유익책이다.


여기서 객체는 신경증자의 관점에서 '(대)타자'로 해석되는 한편, 프로이트 자신의 분류에서도 드러나듯이, 파라프레니아, 곧 정신병적 주체의 관점에서는 (대)타자의 부재로 인해 ─아동과 원시 문화 집단의 정신생활에 대한 관찰에서 유래하듯이─온전히 배제된(verweft)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기 위한 기표 연쇄가 대신 자리 잡는다. 다시 말해, 파라프레니아에서의 과대망상은, 마치 전이 신경증(강박증, 히스테리)에서 환상 속 ‘객체’에 리비도를 배치하는 것과 유사하게, 이 리비도를 처리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파라프레니아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회복 시도(restutitionsversuch)이며, 이로 인해 환자는 눈에 띄는 병적 증상을 보이게 된다.(나르시시즘 입문 中)


억압을 유도할 대타자, 혹은 주체이상의 부재나 파괴는 (프로이트의 분류에 따르면) 정신분석에서 '본래적(히스테리적) 파라프레니아'로 분류되며, 정신병과 슈레버 판사와 같은 강박신경증적 부류로서 편집증과 구분된다. 내 생각에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부류의 차이로서 구조분류학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나름 성과가 있겠지만), 생물학적 성, 혹은 스스로 진단할 수 있는 구조와 무관하게 “나는 잃어버렸지만, 저 사람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주체의 심리적 기제가 정신병적 주체'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외부 객체'로부터 회수된 리비도로 다시 작업해냈다는 프로이트적 관찰에 근거한다면 말이다.


정신병적 주체가 망상적으로 창조해낸 객체란 결국 규범화되거나 학습된 이상적 틀로부터 벗어나, 원초적 나르시시즘의 상태로 회귀한 상태에서─혹은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진입한 적 없는 상태에서─다시 작업해낸 무엇이라는 점에서, 그것을─이렇게 말하는 게 허용된다면─그것이 '진정한' 객체라고 부를 수 있는지가 신경증자보다 불명확해진다.


그런 관점에서는 슈레버 판사의 편집증적 망상의 확신을 두고, “나는 유지하지만, 저 사람은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3].


2. 프로이트 이후, 프로이트와 함께

라깡의 R도식


라깡의 I 도식 : 사라진 주체의 자리와 대타자의 자리는 각각 i, I가 차지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현실감 상실이 아니라 현실감 상실을 대체하는 심급이다[5]. 즉, 발병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신경증과 마찬가지로 '병'에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시키는 장치가 중요하다. 심리학적 해석은 “지각 주체”라는 기이한 심리학적 모델을 기반으로 하며, 언어적 매개 없이 즉시 현실을 수용하는 주체를 전제한다. 반면, 오직 환각의 텍스트가 문제라면 언어학자는 곧바로 하나의 구분을 확립할 수 있다. 코드의 현상들과 메시지의 현상들이 그것이다(ibid, p.641)[6]. 구멍 난 아버지의 자리를 꿰차고 들어오는 신의 목소리는 무엇을 표지하는가? 천박하면서도 차라리 옳지 않게 생각하는, 그러나 견고하게 짜인 다른-것(autre chose)(ibid, p.652-653)은 또 다른 무대(ein anderer Schauplatz)로서 의식하지-못함(l'inconscient)과 무엇이 닮아있을까?[7]


신경증자와 정신병자의 구분이 온전히 결정적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대타자에 대한 동물의 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p.656), 그 둘의 접접이란 신경증의 매우 산발적인 단초─실재의 부르전 끄트머리로서 말실수, 꿈 등의 형태로─속에서나 드러날 뿐이다. 대타자의 구멍은 은유적 효과의 결여로 인해 남근적 의미에 상응하는 또 하나의 구멍을 만들어낸다.(ibid, p.663)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전부가 아닌(pas tout)의 답만 내놓을 수 있는 주체는─라깡의 I도식에 따른다면─여기서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a-a'의 상상적 관계가 대타자 A에 의해 응시함에서 응시됨으로 전환되지만, 대타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주체의 현실은 체계 속에서 폐제forclose된 것이고, 죽음의 양식하에서만 시니피앙들 속으로 들어간다. 시니피앙들의 이 놀이가 지시하는 한에서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지만 말이다'. (ibid, p.656)


슈레버 판사의 사례로 대표되는 해당 도식은 프로이트의 을 보강하는데, 시니피앙 사슬의 지지물이 주체에게 결여되면서 생긴 이 구멍, 대타자의 공백에는 I가 들어선다. 단, 점근선적인 현실성으로만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 인력과 척력의 도식에서 주의해야할 것은, 라깡도 경고했듯이 분석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게 한다면, 그 자리에서 폐기해버리는 편이 낫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오직 '주체의 증언을 오롯이 합리적이라' 가정하는 대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프로이트는(혹은 그의 위대함은) 그의 논문에서도 학술적으로 엄밀한 것-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Ich-libido 개념의 무성(無性)적 특성을 꼬집어 비판한 융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이 이론에 완벽히 포섭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본 것을 증언하지 않을수밖에 없다는 노력 덕에 20세기 지성인들의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따라서 더욱 신경증자-정신병자의 이분법적 구분은 의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슈레버의 (작은 kleiner) 플레지히에 대한 전이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의 지적, 즉 그것이 죽은 형이나 아버지로부터 도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정당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슈레버 판사의 I는 분명 이론적으로 구분된 신경증자의 그것과 다른 I다. 이 I란 '이론적으로는' 주체로부터 스며나와 창조된 것, 동시에 대타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니피앙으로 가득 채운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사실이란, 슈레버 판사가 아버지와 형에 대한 기억을 신성화하듯이, 그 I란 그저 형, 혹은 아버지를 대체하는 무엇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슈레버가 망상적으로 지어낸 플레지히의 족보(고트프리트Gottfried, 고트리프Gottlieb, 퓌르히테고트Fuerchtegott, 다니엘Daniel)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기능을 표현하는 중요한 상징적 사슬들이다. 이들은 다시 복종하기 위해 주체로부터 창조된 것, 마치 도착증자가 창안해 낸 대타자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무엇인가를 잊기 위해 만들어 낸 신, 신을 지우기 위한 신 말이다.


라깡이 세미나 23 1976년 2월 강의에서 '미쳤다'고 말한 제임스 조이스조차, 그의 유산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고 설명한 대목은 이 설명을 뒷받침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집필한 저서 에서) 이 신앙은, 그가 교육을 통해 형성된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입니다. 스티븐은 분명히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사유 전체를 지탱해주는 골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명확히 “나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선언하지 못합니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그 모든 체계 전체를 거부할 때 따라올 거대한 파급효과 때문입니다. - séminaire XXIII (Jacques Lacan)

아버지의 이름의 폐제 속에서, 그리고 아버지의 은유의 실패 속에서, 우리는 정신병의 본질적 조건을 제공하는, 정신병을 신경증과 구분시키는 구조를 제공하는 결함을 찾아낸다[8]. 그렇기에 라깡이 이 '정신병의 모든 가능한 치료에 전제가 되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내놓은 해결책이란 하나의-아버지(Un-pére), 혹은 일자(Un), 혹은 임의의 무엇 하나(un ~)의 도래다(ibid p.683-684). 왜냐하면 라깡이 이 글을 통해 밝힌 정신병의 범주란 '어머니가 법을 만드려고 아버지의 말을, 권위를, 달리 말해, 아버지의 이름에 주요한 위치를 사용하는 사례들(ibid p.685)'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이스의 사례를 이렇게 가정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모두에게, 혹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욕망을 품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결코 그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compensation)이 아니었을까요?
(...) 조이스에게 고유명은, 단순히 아버지의 자리에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세운 가치로 이해됩니다. 그는 자신에게 고유한 이 이름에만, 그 누구에게도 바친 적 없는 찬사(hommage)를 바치고자 했습니다. - séminaire XXIII (Jacques Lacan)

조이스의 찬사와 마찬가지로, 슈레버 판사도 어떤 좌절이 찾아온 뒤 아버지의 이름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슈레버와 조이스의 차이점이란 일면 그들 각각이 일종의 문학-쓰기의 주체로서 자신의 행위를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나는 듯 하다. 라깡의 표현대로라면, 조이스는 '풀려버린 구조(dénouement), 그 결속이 해제된 상태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보완하고 있었던 존재'이며, '아버지를 대신해 스스로' 고유명을 발명하였다. 반면 슈레버의 망상은 '남자 구실도 못하는 것', '밀려드는 것', '여자가 되는 것', '강간당하는 것', '상징적 마조히즘의 형태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 수동성은 만들어진 아버지I와 대타자의 반향이 없어 죽은 주체의 자리를 뻔뻔히 차지할 수 있는 '상상적 나i'에 의해, 현실감R에 겨우 점근선적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위태로운 구도로부터 비롯된다. 비록 의도한 작업은 아닐지언정 슈레버의 I는 타자성보다는 주체로부터 창조된 것이기에 조이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를 표현할 마땅한 이론적 도구가 내게 없음은 솔직히 고백하지만, 슈레버의 현실을 대체하는 심급의 형성 과정은 그로부터 풍기는 불안한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조이스와 달라보인다. 말하자면 슈레버는 사랑하는 아버지와 형을 상위 신과 하위 신으로 다시 소환해내는 것도 모자라, 자신이 '여자가 되어 신과 성교를 해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다. 슈레버 자신이 퇴원 후에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와 일상생활─심지어 매우 탁월한 지적 능력을 뽐내면서─을 구분할 수 있는 안정적 망상의 능력을 증명해보였으므로, 다소 기이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 '온전히 폐제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내 생각에, 슈레버의 망상은 사라진 아버지의 흔적을 어설프게라도 다시 쌓아올리려는, 그리하여 상상적 아버지로부터 다시 거세당하고자 했던, 그렇게라도 다시 아버지를 불러내려 했던 애처로운 작업의 일환에 불과하다[9].


<각주>

[1] 장 이폴리트 박사도 이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존재판단에서는 자아 또는 보다 정확히는 주체(이것이 보다 포괄적입니다)에게 하나의 표상을 귀속시키는 것이 문제인데, 보다 이전 단계에서는retour en arrière 이 표상에 상응하는 대상이 존재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외부와 내부의 발생입니다.

장 이폴리트, 프로이트의 「부인」에 대한 구술 주해. 에크리 한국어 번역본. p.1049-1050


[2] 원문표현은 다음과 같다.

Wir bilden so die Vorstellung einer ursprünglichen Libidobesetzung des Ichs, von der später an die Objekte abgegeben wird, die aber, im Grunde genommen, verbleibt und sich zu den Objektbesetzungen verhält wie der Körper eines Protoplasmatierchens zu den von ihm ausgeschickten Pseudopodien.


[3] 프로이트가 '본래적 파라프레니아'라고 분류한 범주의 극단적 형태라면, 아마 '나도 없고, 너도 없다'이지 않을까? 혹은 '팔루스? 그게 뭐야?'일지돋 모르겠다.


[4] 상징적 삼각형의 세 꼭짓점 가운데 I는 자아의 이상형, M은 원초적 대상의 시니피앙, P는 A에 위치한 아버지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 S의 의미와 남근의 시니피앙 사이의 상동성 확립이 Mimi의 사각형에 의해 구획된 현실의장의 지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포착할 수 있다. 이 사각형의 다른두 꼭짓점인 와 m은 나르시시즘적 관계의 두 가지 상상적 항, 자아와 반영적이미지를 표상한다. p.658

에로틱한 공격 관계들에서 성립하는 상상적 타자의 형상들이 자리 잡는 Si, Sa', Sa², Sa', SM의 선분들의 극단들을 와 M(또는 a) 사이에위치시킬 수 있다. 마찬가지로 m과 I(또는 a')에는, 자신의 반영적인 원초적 상Urbild에서 자아의 이상형에의 부성적父性的 동일시에 이르기까지 자아가 동일시하는 Sm, Sa", Sal, Sam, SI의 선분의 극단들이 위치한다p.657


[5] 라깡, 정신병의 모든 가능한 치료에 전제가 되는한 가지 문제에 대해. 에크리 한국어 번역본. p.636.


[6] 신경증자와 구분 짓기는 했지만, 주체 자신의 (회수된) 리비도로부터의 불안으로 인해 지어낸 망상이 근본언어(Grundsprache)를 사용하는 목소리로 현상하여 '새로운 코드를 구성하는 형식들과 용법들을 알려준다'는 사실은, 정신병적 주체에 관한 정신분석적 설명─'정신병자에게는 무의식이 없다'─을 다소 불분명하게 만든다. 아마도 프로이트의 구분, 즉 본래적 정신병자와 편집증적 정신병자의 구분은 아마 남근의 거부(혹은 폐제verwerfung)가, 그의 논문 부정(Verneinung)에도 나와있듯이, '존재판단의 신화적 심급에서 순차적으로 이미 발생했는가, 혹은 속성판단로부터 회귀하여 발생했는가' 문제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화를 발달학적 관점과 합치시키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꺼림칙하다.

따라서 구분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라깡과 프로이트 모두 둘의 신경증자-정신병의 이분법적 구분을 스스로 모호하게 만드는 지점에 주목해야하지 않을까.


[7] 그 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정신분석의 접근에서는 분석주체에 대한 이해 여부가 문제가 아니다. 그처럼 메스꺼운 범주는 야스퍼스 씨와 그의 동료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다(ibid, p.641). 정신병자는 정신병 안에서 정상이며, 이는 정신병자가 욕망에서 육체를 다루는 한에서 더 그러하다. 도착증자는 도착증 안에서 정상이며, 이는 도착증자가 다양한 형태의 팔루스를 다루는 한에서 더 그러하다. 신경증자도 신경증 안에서 정상이며, 이는 신경증자가 대타자를 다루는 한에서 더 그러하다. (라깡, 세미나 IX) 분석가가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단지 교조주의적 계몽 같은 하찮은 대의를 위해서는 결코 아닐테며, 무능을 포장하기 위한 현실감의 회복 따위를 목표로 삼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8] 에크리 번역본, p.681


[9] 당연히 이것이 도덕적으로 (제임스 조이스보다) 열등하다든가, 그의 인생이 마냥 안타깝다든가 하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누구에게나 주제 넘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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