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아킨 피닉스 주연의 『조커』(2019)는 당초 대중 오락물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난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하게 폭발적인 호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대중은 그 속에서 단순한 만화 캐릭터가 아닌, 소외된 개인이 사회적 구조 속에서 어떻게 파열음을 내며 분열되어 가는지를 목도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아서 플렉이 '조커'라는 상징으로 완전히 변모하고, 혼란 속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가 피살되는 장면은 일종의 '사회 구조에 대한 대중의 복수적 판타지'로 작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3년 뒤 발생한 유나이티드헬스케어 CEO 총격사건은, 조커 1편의 막바지에 등장하는 장면과 겹쳐 보이기에 이르렀다. 물론 어떤 사람의 죽음도 불쾌하지 않다는 주장을 쉽게 하기는 어렵지만, 대중 일부가 이 사건에 냉소적이거나 환호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상식적 도덕감정의 경계를 시험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비상식적인 반응'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누적된 피로감과 분노, 그리고 그 감정이 특정한 상징을 통해 표출되려는 시도로 보아야 마땅하리라.
이러한 맥락에서 『조커: 폴리 아 되(Folie à Deux)』는 단순한 속편이 아니다. 이 영화는 1편이 제공했던 집단적 카타르시스와 신화적 상징, 즉 '조커'라는 존재의 영웅화 서사를 냉혹하게 해체한다. 대중은 여전히 조커가 사회 시스템의 모순을 폭로하고, 광기를 통해 혁명을 수행하길 원하지만, 토드 필립스는 이 기대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2편은 조커의 외부가 아닌 내부, 즉 아서 플렉 개인의 분열된 심리와 무너진 상징계 속으로 카메라를 들이민다.
아서가 더 이상 조커로서 기능하지 않을 때, 대중이 상징으로 소비하던 조커 역시 무너진다. 이 영화는 그 붕괴의 과정을 서사화하지 않고, 노래하고 춤춘다. 환상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 환상을 붕괴시키는 아이러니. 이 지점에서 『조커2』는 단순한 뮤지컬이 아니라, 환상의 무대 위에서 개소리를 선언하는 연극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개소리는, 허위나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 구조의 균열이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순한 사회 고발이 아니다. 오히려 1편이 구축한 조커 신화를 벗겨내고, 그 허상을 대면하게 한다. 리 퀸젤이라는 인물 역시 단순한 러브라인 캐릭터가 아니라, 조커의 환상과 상징체계를 반사하는 거울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조커를 믿었고, 환상을 소비했고, 혁명의 대리인을 상징화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모든 감정과 구조를 무효화하며 말한다. 조커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를 둘러싼 의미는 전부 사후적으로 부여된 개소리에 불과했다.
'자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 플렉'이라는 고백 이후에 아서는 조커의 완벽한 (후에 환상에 의존한 것으로 밝혀진) 파트너, 리 퀸젤을 찾아간다. 여기서 그녀의 대사는, 영화에 실망한 대중적 반응과 정확히 일치한다.
"우린 도망가지 않아, 아서. 우리가 가진 건 환상뿐이었는데, 네가 그걸 포기해 버렸어. 우린 어디도 가지 않을 거야. (...) 조커는 없잖아. 네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이 장면은 조커의 '해체'가 단순히 한 캐릭터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이는 상징계 전체, 즉 대중이 감정이입을 통해 구축한 조커 신화의 해체이며, 동시에 그 신화를 통해 현실을 위로받고자 했던 관객 스스로에 대한 반성적 시선이기도 하다.
혁명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단어다. 이 패러다임이 아닌 새로운 무엇, 패러다임으로 불릴 수도 없을지 모르는 무엇. 우리는 도래할 무엇에 잔뜩 힘을 주고 이상화를 시도하지만, 그 옛날 시도되었던 어떠한 개혁과 혁명이라도 결코 '이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조커 1편은 이 혁명적 서사를 잠시 대중이 다시 붙들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지만, 2편은 그 신화를 깨부수며 말한다. 그것은 환상이고, 우리는 그 환상 속에서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고.
『조커2』는 대중적 열망을 배반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배반을 통해 조커라는 신화의 본질, 즉 개소리의 구조를 드러낸다. 더 이상 조커는 구조를 전복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구조가 허용한 상징으로 소비된 인물일 뿐이었다. 아서 플렉이 그 상징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조커라는 형상도 함께 무너진다. 이 영화는 단순한 히어로물의 전복이 아니라, 상징 자체의 무용함을 폭로하는 메타-파괴의 영화다. 그리하여 『조커2』는 웃을 수 없는 희극이자, 우리가 조롱하던 모든 개소리들이 결국은 우리 자신의 언어이자 믿음이었음을 되묻게 만드는 미러다.
『조커2』는 상징이 무너지고, 환상이 붕괴하며, 남겨진 자리에 진정한 개소리가 도래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지만, 영화는 반복해서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건 다 너희가 만들어낸 거다." 이 냉소적인 반복 속에서 우리는 환상을 잃고, 비로소 진실을 본다. 그것은 더 이상 웃길 수 없는 농담이며, 그래서 진짜 농담이다.
신화는 죽었고, 이제는 개소리만이 남았다. 그리고 이 개소리는, 우리가 만든 모든 도덕과 질서와 혁명의 이야기들이 결국 하나의 기호, 하나의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귀결된다는 진실의 다른 이름이다. 생각해 보자, 진부한 혁명 서사를 따르는 대중영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엘리시움, 설국열차, 브이 포 벤데타, 체 게바라, 1987...
나는 어떠한 혁명도 도래할 미래 앞에서는 의미가 없으므로, 개혁할 의지나 그와 관련된 어떠한 시도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중영화에서 기존의 혁명 서사가 하나의 소비재로 자리 잡은 만큼, 그리고 그것을 단지 하나의 판타지로 소비하는 사람들이 주류로 자리 잡은 만큼, 그런 혁명은 더 이상 인간사회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조커 1편에 이어 2편이, 기존의 혁명 서사에 충실하게, 조커가 미쳐 날뛰어 사회를 전복시키는 서사를 유지했다면, 여태까지의 혹평은 피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조커 2편에 대한 곱지 않은 대중의 시선이야말로 희망의 불빛이다.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혁명이 대체 어떤 관점에서 혁명으로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