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by. 자끄 알랭 밀레)

by 숨듣다

『라깡과 함께 조이스를(Joyce avec Lacan)』이라는 제목은 제임스 조이스와 자크 라깡이 팔짱을 끼고 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보았던, 자크 오베르가 라깡에게 조이스에 관한 최신 서적을 들고 와서 함께 릴 거리(rue de Lille)를 걷던 그런 모습은 아닙니다.


『조이스와 라깡』이라는 제목은 라깡의 독특한 저작 중 하나인 『칸트와 사드』를 연상시키며, 『정신분석의 윤리학』을 열심히 읽은 많은 독자들이 이 제목에서 그 세미나의 주요 주제를—더 정확히는, 그 주제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방식으로 전개된 것을—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칸트와 사드』는 라깡에게 있어 『실천이성비판』과 『사랑의 방 철학』(Philosophie dans le boudoir)이 서로 조응한다고, 후자가 전자를 보완하고 그것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사드의 원리를 ‘칸트 방식’으로 공식화하면—즉, 쾌락에 대한 권리를 보편적 규칙의 형태로 제시하면—우리는 ‘법을 위한 법’이라는 칸트적 의지가 ‘쾌락을 위한 의지’와 구조적으로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의지는 모두 주체를 분열시키며, 그를 안락함과 쾌락 없는 선(즉, 도덕성과 쾌락) 사이에 갈라놓습니다.


이 흠잡을 데 없는 논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유머 없이는 진행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합리성이 합리성을 넘어서 극단까지 밀어붙여질 때—즉, 이성에 대한 존중 없이 이성이 작동할 때—그 결과는 종종 유머를 동반합니다.


이 모든 것은 초자아(surmoi)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유머의 효과 안에서 초자아의 존재를 명확히 지적했으며, 그가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임상적 명제는 아주 간단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즉, 프로이트가 지적한 오이디푸스 이후의 초자아는 멜라니 클라인이 발견한 오이디푸스 이전의 초자아를 계승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칸트와 사드』는 좀 더 은밀한 『프로이트와 클라인』을 가리고 있는 옷과도 같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X와 Y’ 형식은 하나의 절차로서 성립할 수 있으며, 보다 일반화된 방식으로도 적용 가능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간섭적(interférence) 독서 방식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여전히 빛을 발하는 편집증-비판적 방법(méthode paranoïaque-critique)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이 책에 실린 여러 편의 글이 과연 이 제목이 가진 절묘한 뉘앙스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제가 평가할 사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제목은 각 글을 읽기도 전에 제가 자크 오베르에게 귀띔한 것이며, 그 적절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그에게 맡겨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책에서는 조이스에 대해 라깡의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며, 라깡을 조이스의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애써본다 해도, 제가 정신분석학과에서 진행하는 강의는 결국 라깡을 라깡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라깡이라는 이름 아래 오직 하나의 의미만 존재한다면, 이러한 방식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로, 라깡은 언제나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우리는, 조이스가 어떻게 라깡의 사유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책의 서문에서, 라깡이 조이스와 함께 무엇을 시도하고자 했는지를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그 출발점은 바로 1956년의 『도난당한 편지에 관한 세미나』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 “A letter, a litter(편지이자 쓰레기)”입니다.


라깡은 이 표현을 통해 하나의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합니다. 즉, 편지란 단순히 기표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편지는 하나의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나의 사물(objet)이라는 것입니다.


기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호가 어떤 의미 효과를 발생시킬 때, 이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기호 전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말하는 행위에서는 그 소리가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기표의 기능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읽힌 편지는 남습니다.

편지는 쓰레기통에 버려질 수도 있고, 찢기거나, 보관되거나, 보여지거나, 잃어버리거나, 팔리거나, 도난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편지의 물리적 운명은 기표가 수행하는 의미 생성 기능과는 별개의 차원에 속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기표의 수신자와 동일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편지 그 자체”를 사물로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논점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깡이 쓴 포(Edgar Poe)에 대한 글과, 지드(Gide)에 대한 텍스트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드의 젊은 시절 혹은 편지와 욕망』에서는, 마들렌이 복사본 없이 앙드레가 보낸 편지를 불태우는 장면을 통해 편지의 쾌락적 의미, 즉 페티시로서의 성격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편지가 지니는 기의의 효과가 아니라, 편지가 하나의 쓰기된 기호로서 발신자에게서 가져가는 쾌락입니다. 따라서 편지가 어떤 운명을 맞더라도, 그것에 대한 최종 책임은 결국 발신자에게 귀속됩니다.


이처럼 말의 기능만으로는 언어의 장 전체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라깡이 자신의 초기 강의를 시작하며 붙였던 제목을, 네 해 후의 보완을 반영하여 다음과 같이 수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신분석에서 말, 편지, 언어의 기능과 장에 대하여.”


이러한 보완은 단순한 개념의 확장이 아니라, 임상에서 비롯된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언어 구조 안에서 편지의 역할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이 가능한 증상은 해석 가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은 단순히 의미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프로이트가 ‘치료적 반응의 한계’로서 발견한 부정적 치료 반응(réaction thérapeutique négative)이 보여주듯, 증상은 반드시 쾌락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증상은 언어와 구조적으로 동일할 수 있지만, 말의 흐름 속에 위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의 흐름이 아니라, 쓰기의 흐름 속에 ‘기입(inscription)’되어 있는 것입니다. 라깡은 1957년 이 점을 명시적으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쾌락과 의미는 증상의 글쓰기 속에서 어떻게 결합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은 라깡의 가르침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문제입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은, 라깡의 욕망의 그래프에서 제시됩니다. 이 그래프는 욕망의 환상(fantasm, $ ◊ a)과 욕구의 의미(S(A)) 사이의 간섭 관계를 통해 문제를 풀고자 합니다.


이 간섭 관계를 라깡은 『텔레비전』에서 다시 정의하며, 이를 ‘의미-쾌락(jouis-sens)’이라고 명명합니다. 이 개념은 그를 결국 조이스-증상(Joyce-le-Symptôme)이라는 주제로 이끌며, 언어의 장에서 다시 쓰기로부터 정신분석을 질문하는 새로운 시도를 탄생시킵니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기존의 ‘의사소통’ 도식은 더 이상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해도, 그것이 곧바로 대타자의 담화로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은 오직 정신분석이라는 인위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담화로 전환됩니다.


본래 자폐적 쾌락의 자리였던 증상은, 분석을 통해 기의의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분석은 증상 안에 ‘안다고 ㄱ가정된 주체(sujet-supposé-savoir)’라는 특수한 의미 효과를 도입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증상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암호화된 기호이며, 동시에 쓰기의 쾌락, 즉 순수한 주이상스입니다.


저는 올해 강의에서 라깡이 그의 마지막 가르침을 시작하며 내놓은 증상 정의에 대해 길게 논한 바 있습니다. 그 정의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무의식이 한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각자가 무의식을 향유하는 방식.”


이 정의는 1974~75년에 진행된 RSI 세미나의 핵심이며, 그 결말로 『조이스-증상(Joyce-le-Symptôme)』이라는 강연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강연은 이 책에 실려 있으며, 다음 세미나인 『증환(le Sinthome)』을 예고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 당시 라깡에게 있어—그 진의를 누가 정확히 파악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그가 던진 질문은 정신분석의 토대를 가장 급진적으로 다시 물었던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담화 바깥에서 증상을 사유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깡은 이전까지 다양하게 구축되어 온 담화 구조에 기반한 도식들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 대신, 상징계가 더 이상 ‘대타자의 장소’로서 상상계를 내려다보거나, 실재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둘러싸는 방식이 아닌, 상징계 역시 세 요소 중 하나로서 동일한 위계에 위치하는 새로운 위상학적 접근이 도입됩니다.

바로 여기에, 의미 작용을 벗어난 방식으로 편지를 다루며 쾌락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인물, 조이스가 중요한 참조점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라깡이 정신병을 언급한 것은 결코 단순한 ‘정신분석의 적용’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분석 불가능한 증상’으로 간주된 조이스의 증상을 통해 분석가의 담화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증상에 동일시된 주체가 분석의 장치에 스스로를 닫아버릴 때, 분석가의 담화는 그 작동 기반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진정한 분석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결말은 바로 이러한 국면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짧은 글을 통해, 라깡의 문장이 처음 보기에는 아무리 난해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질지라도, 그 어느 문장도 ‘진정한 사유의 질서(ordres des raisons)’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그 사유는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문제들—무엇보다도 정신분석의 경험 그 자체—을 되비춰주는 것임을 충분히 전달해드렸기를 바랍니다.

이는 예술가에 대한 어떤 멸시에서 비롯된 태도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분석가에게, 예술가로부터 배울 것을 제안하는 초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87년 3월 30일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