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I. 머리말
II. 연구 방법
1. 질적 연구의 필요성
2. 자료 수집 방법
3. 연구참여자 선정
4. 자료 분석 방법 및 과정
5. 연구의 타당성과 제한점
III. 연구 결과 및 논의
1. 양안 관계 인식
1) 대만의 청춘 드라마는 우리의 우상(偶像)이다
2) 대만은 역사이래로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다
3) 대만 문제는 민족단결 문제의 핵심이다
2. 남북 관계 인식
1) 한국 언론은 북한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2) 항미원조(抗美援朝), 중국은 자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했다
3)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의 제재가 남북 갈등의 원인이다
3. 양안과 남북 관계 인식 비교
1) 남북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이며, 양안은 중앙 정부와 지방의 관계이다
2) 남북과 양안의 내분은 미국에 의한 민족상잔이다
2) 대만은 역사이래로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다
연구참여자들의 대만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은 연구참여자들이 유년 시절 겪은 경험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고, 연구참여자 개개인들에게도 어떠한 주제로 접근하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다. 대만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영향을 끼치는 요소 역시 다양하게 나타났는데, 대만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을 파악하는 과정에서는 대만으로부터 전파된 매체 문화와 가족이 주요한 매개체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각 연구참여자들이 대만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떤 인상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살펴보면, 현재 중국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서 대만 역사를 구체적으로 배우지는 않는다. 따라서 학생들이 대만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의 역사교과서를 살펴보면, 대만과 관련된 언급은 위·진 남북조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의 대만은 이주(夷州)로 표기되어 있는데, 손권(孫權)이 군사를 이끌고 진출함으로써 내지와의 연계를 강화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후, 촉(蜀)의 제갈량(諸葛亮)이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지역민의 삶이 개선되고 남부 지역의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고 서술함으로써 중앙 정부와의 교류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수·당 시기 이후부터는 지도상에 중국 영토의 일부로서 류큐(琉球)로 표기되어 있다. 대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원 왕조가 수립된 이후 변강 지역에 대한 서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원 왕조는 변강 지역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펑후섬(澎湖島)에 검사(檢司)를 설치했다.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역사상 중앙 정부에서 최초로 대만 지역에 대한 정식적인 행정 기구가 설치된 시기로 보고 있다.
대만과 관련된 서술은 청초 정성공의 활동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우선, 정성공과 관련된 서술은 <통일적다민족국가의 공고와 발전(統一多民族國家的鞏固和發展)>이라는 목차에 배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족단결과 통일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농후할 가능성이 크다. 교과서에서는 정성공을 ‘민족영웅’으로 묘사하면서 기존의 식민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을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위해 흥기한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대만으로 이동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조국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외세를 몰아내기 위함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대만 관련 서술은 국공내전에서 등장한다. 이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마오쩌둥의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의 담판과 내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국공내전의 결과, 최종적으로 장제스의 잔여 세력이 대만으로 후퇴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는 현재 대만에도 정부가 존재하고, 중국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명을 회피하고자하는 의도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현대사 중 <민족단결과 조국통일(民族團結與祖國統一)>에서 양안 관계를 다루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중화민족의 개념과 소수민족과의 유기적 단결 사례를 설명하며 민족단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홍콩과 마카오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중국 정부의 일국양제 정책이 성공적으로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의 마지막 부분에 양안 관계를 배치함으로써 민족단결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양안 관계에 대해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대만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부분은 앞서 상술한 바와 같다.
이처럼 중국이 강조하고 있는 애국주의 역사교육의 목표는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함양하는 것뿐 만 아니라, 중국의 대통일 정책의 당위성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일국양제에 관한 정부의 정치 노선 중심의 교육으로, 중국 정부가 고수하는 통일 원칙과 방침을 강조하고, 홍콩과 마카오, 대만 지역에서 중국 통일을 위해 기여한 바를 선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실제로 연구참여자들은 모두 학교의 역사 수업을 통해 대만에 대해 배운 적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중국사의 일부로서 배웠다. 또한, 대만 역사를 별도로 배운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과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배운 것으로 확인되며, 지방사의 일부로서 여겨지는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 대한 수업은 역사 수업 이외에 정치 수업을 통해서도 대만과 관련된 수업이 이루어졌는데, 정치 수업에서는 주로 현대 중국과 대만의 정치·경제적 관계를 중점적으로 배웠다.
<표 9> 대만의 중국 영토 편입 시기에 대한 인식
인터뷰 결과 연구참여자들은 대만의 중국 영토로 편입시기에 대해 다양한 시기를 근거로 답변했다. 역사 수업 시간에 대만과 관련된 학습이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인식의 차이는 역사교사의 차이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4명의 연구참여자는 정성공이 대만을 정복한 이후라고 답변했다. 물론, 그전에도 중국과 대만이 교류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정식적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어 중앙 정부의 관리와 통제를 받기 시작한 것은 정성공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라는 것이다.
대만이 역사상 줄곧 중국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는 연구참여자도 4명이었는데, 이들은 연구자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이와 같이 인식하고 있는 이유와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즉, 자신이 어떠한 사실과 근거를 통해 이와 같은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가족과 매체 등을 통해 주입받은 지식을 자연스럽게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연구참여자들에게 학교 역사수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배웠는지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함과 동시에 정성공의 대만 정벌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중점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연구참여자1]: 저는 ‘대만은 역사이래로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고, 중국과 분리할 수 없는 일부분입니다’라고 배웠습니다.
[연구참여자4]: 대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중국의 고유한 영토입니다. 저는 이 표현에 동의합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연구참여자1의 답변은 연구참여자3, 연구참여자4, 연구참여자8의 답변과 단어 선택과 표현이 유사하다. 이들은 연구자의 질문에 “대만은 역사이래로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고, 중국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부분이다(臺灣歷史以來就是中國的領土,是中國不可分割的一部分)”라고 대답했다. 이 표현은 중국의 서적과 매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다. 대만 이외에도 영토 분쟁과 분리·독립 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지역에 대해 이 표현이 인용되곤 한다.
특히, 연구참여자1과 연구참여자4는 이 표현에 대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어투로 응답했다. 연구참여자1과 연구참여자4는 그 원인에 있어 문화적 유사성을 가장 큰 요소로 꼽았다. 문화적인 유사성에는 민족과 언어 등이 포함되는데, 대만이 줄곧 중국의 영토였다고 답변했던 연구참여자들은 다른 연구참여자들에 비해 격앙되고 확신에 찬 어투로 응답했다. 연구참여자4는 대만은 줄곧 중국의 일부였기 때문에 동일한 민족이고, 오랜 기간 동안 외세의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연구참여자1]: 역사적으로 정성공에 대한 평가는 좋습니다. 그는 실제로 대단한 일을 해내었고, 정성공의 대만 수복이라는 이 사건이 역사상,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적용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구참여자2]: 정성공과 관련된 서술은 아주 정당합니다. 국가는 하나의 국민과 하나의 문화로 조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이 북한과 통일하려는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두 차례의 면담을 통해 연구참여자1과 연구참여자2는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애국주의 교육과 민족단결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대만 문제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 두 사람은 대만이 중국의 고유한 영토라는 주장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다. 또한, 현재 교과서상에 서술되어 있는 정성공에 대한 평가가 정부의 민족단결 정책에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정성공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교과서 내용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연구참여자3]: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했고, 동시에 대만이 중국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와 관련된 진실은 사실 민족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청복명을 위해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애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연구참여자3]: 정부의 이러한 대처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국가가 국민에게 애국주의 정신을 주입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할 것입니다.
연구참여자3은 정부 주도의 역사교과서 서술이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존재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는 그가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주장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반청복명이라는 주장이 결국 청을 세운 만주족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반청복명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도 만주족과 한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을 부각시킬 수 있는 소재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만주족 등 소수민족을 포섭하려는 민족단결 정책에 부정적인 소재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연구참여자3은 이러한 현상이 중국 역사교과서 서술 상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 다른 국가의 교과서상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하는 필연적인 현상임을 강조했다. 그는 다른 국가의 사례를 들어 이러한 서술을 옹호하기도 했지만, 국가의 안정과 발전이 더욱 중요한 가치라는 점에서도 이를 용인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연구참여자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다소 부적합한 점이 존재하더라도,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민족단결과 애국을 위한 기본적인 전제라고 답변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연구참여자들이 ‘애국’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한 인터뷰를 추가적으로 진행했다.
연구참여자3이 정의하는 ‘애국’은 ‘국가의 발전을 위한 모든 행위와 사상’이다. 그는 현재 중국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만과의 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과업이고, 중국인의 입장에서 양안 관계를 통일로 이끌기 위해 실시되는 모든 정책들은 정당하게 수용될 수 있다. 즉, 비록 그 정책이 폭력성과 부당함을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정당한 것으로 인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인 것이다.
[연구참여자6]: 중국 역사에는 영웅이 상당히 많은데, 예를 들어 악비(岳飛)의 경우 그는 송나라의 민족 영웅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여진족(만주족)은 이미 중국 대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악비를 금에 항거한 영웅이라고 말하지, 민족 영웅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정성공 또한 네덜란드로부터 대만을 수복했지만, 대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인지와는 관계없이 그는 민족영웅이고, 그와 관련된 서술의 비중은 큰 것입니다.
연구참여자6 역시 정성공이 반청복명을 주장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과서 상에서는 그러한 사실들이 서술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는데, 이는 교과서의 목적이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실천과제, 즉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내용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연구참여자1이 역사교과서와 일반 역사서적을 비교하는 논리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연구참여자6의 답변이 흥미로운데, 연구참여자6은 정성공을 악비의 사례와 비교해서 역사 서술의 목적과 그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만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은 이미 중화민족의 일부분으로 이루고 있기 때문에, 민족단결과 통일을 저해할 요소가 적고, 따라서 악비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이는 그가 교과서 서술이 현실적인 조건에 따라 유동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구참여자는 대만 역사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도 앞으로 중국과 대만이 통일을 이루게 된다면, 정성공은 역사교과서 상에서 더욱 객관적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고 답변했다.
[연구참여자8]: 정성공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는 원대한 계획이 있는 전략가이자 항해사입니다. 대만에서 정권을 수립하고, 그 때 당시 한족과 고산족 주민들을 단결시킴으로써 생산력의 증대를 이끌어냈습니다.
연구참여자8 역시 역사교과서 상의 정성공 서술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중국 정부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당연하다고 답변했다. 이와 관련된 면담을 통해 연구자는 연구참여자들이 동일하게 긍정적으로 답변한다 하더라도, 이를 얼마나 옹호하는가에 따라 그들의 답변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참여자8은 중국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높고, 정부 주도의 역사교과서 편찬과 일국양제 등의 통일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연구참여자5]: 학교를 다닐 때 대만에 대해 배운 적 있습니다. 고대사뿐 만 아니라, 현대사 수업 시간에도 배운 적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에서는 비교적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교과서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연구참여자5는 학교 수업을 통해 배운 대만의 역사와 관련된 지식은 많지 않다고 답변했다. 그의 주요한 학습 경로는 중국 정부의 매체 선전과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 서적이다. 연구참여자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가르쳤던 역사교사를 존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고 답변했다. 그에 따르면, 교과서에서 다루는 학습 내용은 간단하고 개괄적인 사실들만 다루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실제 관련된 내용을 학습하는 데에 쓰이는 시간 역시 상당히 적다.
[연구참여자5]: 저는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대만은 일찍이 하나의 국가에 속해 있었고,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이며, 경제 교류가 활발하고 문화적으로 융화되어 있습니다. 중국 고대 국토 상에는 결코 하나의 국가가 있지는 않았고, 역사상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아 나뉘어 있었습니다. 진나라가 6개의 국가를 통합할 때, 강력한 힘을 통해 통일을 했고, 그때가 되서야 점차 통일대국의 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중국은 다민족통일국가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각 지역의 차이가 크다고 해도 크지 않고, 작다고 말해도 역시나 작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이에 대해 중국인은 뛰어난 관용도를 갖고 있습니다. 대만 역시 고대사 상에서 각 국의 통일 과정 중에 일국으로 편입된 국가이고, 흡수되고 융합되었습니다. 이미 흡수되어 전체의 일부분이 된 것이죠. 다시 요약하자면, 일찍부터 독립된 일개국의 개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연구참여자5는 비록 학교 수업과 역사교과서를 통해 배운 지식이 많다고 답변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의 역사교육이 목표로 하는 애국주의적 태도가 충실히 반영된 답변을 보였다. 그는 역사 수업을 통해 ‘중화민족’의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중국 역사교과서에 따르면, 현재 중국은 다민족통일국가로서 그 주체는 한족과 한족 문화가 아니라 중화민족이다.
중화민족은 역사상 분열과 통일을 거듭하며 완성되어 왔으며, 다양한 소수민족과 그들의 문화 역시 한족의 문화와 융합되어 발전되어 왔고, 중국의 일부를 이루는 구성 요소인 것이다. 다른 소수민족과 마찬가지로 대만도 동일하며, 정성공의 대만 수복 이후부터 대륙과 대만은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연구참여자5는 비록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념 대립으로 인해 교류가 끊어진 시기가 있었지만, 현재 중국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참여자9]: 당연히 배웠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배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타이완과 관련된 부분이 한쪽을 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인상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92공식(九二共識)’과 ‘왕고회담(汪辜會談)’입니다. 하지만 결코 대만이 왜 중국의 일부분인지에 대해서는 토론한 적 없습니다.
연구참여자5와 연구참여자9, 연구참여자10은 대만 문제는 현대 중국 정부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답변했다. 연구참여자5는 연구참여자1이나 연구참여자4와 동일하게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 주장했었지만, 이는 도덕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기준이 아니라, 대만과의 통일이 자국의 경제 발전과 패권 국가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답변한 것이다. 즉, 대만을 중국의 일부라 주장하는 동일한 견해 사이에서도 이에 얼마나 동조하고 공감하는 가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참여자9와 연구참여자10의 경우에는 대만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대만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중국 대륙의 것과는 차별화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대만에는 오래 전부터 고산족들이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해서 독자적인 문화를 향유해 왔고, 1949년 이후에는 중국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발전을 이루어내었고, 민주주의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중국 정부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은폐하고 있으며, 중국과 대만의 공통적인 부분만을 강조해서 선전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연구참여자9]: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은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정치적인 권력을 이용해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정성공에 대한 역사교과서상의 서술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과서와 인터넷, 외국 서적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수집해서 정성공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상대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즉, 다시 말하면 역사는 정치를 위해 복무해서는 안 됩니다.
연구참여자9와 연구참여자10은 역사교육 인식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답변했던 내용과 유사한 답변을 보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대만은 중국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있지 않으며, 중국 정부가 정성공의 대만 수복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강조하며 대만과의 통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에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역사는 정치권력과 독립된 별개의 영역인 것이다.
[연구참여자10]: 선생님은 대만이 식민지 점령을 당한 경험이 많기 때문에,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숙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중국 집권당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세계 각 국은 악랄한 정권에 타협하고 있으며, 이 문제를 방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성공에 대한 서술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역사라는 학문의 핵심은 객관성에 있어야 하는 것이죠.
연구참여자9와 더불어 연구참여자10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대만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에 따르면, 학교의 역사 교육은 객관성을 상실한 채, 학생들에게 정부 정책을 주입시키는 도구인 것이다. 두 연구참여자의 인식에 대해서는 후술을 통해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면담 결과 역사교과서상의 정성공 서술에 대한 연구참여자들의 견해는 현대 중국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답변이 주를 이루었다. 몇몇 연구참여자들은 정성공과 관련된 면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앞선 인터뷰에서 답변했던 역사를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이사위감(以史爲鑑)’이라는 말을 인용하곤 했다. 이는 중국이 과거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을 교훈삼아 현재 직면한 문제들을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한편으로는 중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역사교과서 서술에 관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참여자들의 답변은 정당하다는 답변과 부당하다는 답변으로 나뉘었다. 정당하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연구참여자마다 각자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비록, 답변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졌지만, 두 대답 모두 현재 중국의 역사교육이 당국이 정치 운영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중국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상에는 모두 정성공을 다루고 있는데,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경우 정성공의 대만 진출과 그 활약상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역사교과서에서는 정성공을 복건 출신의 인물로서 대만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내고, 대만을 수복한 인물로서 묘사하고 있다. 즉, 역사교과서상에서는 민족단결을 공고하게 만든 영웅으로써 묘사되고 있는 것인데, 대부분의 연구참여자들에게도 정성공은 대만을 수복한 영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