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인가
사람과의 관계든, 일해온 직장이든. 나는 성격이 억세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지녀온 생각에 어긋나면 둥글하게 포용하지 못 하고, 그 관계에 회의적인 시선을 내비친다. 나이에 따라 차이가 있다면, 어렸을 때는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버렸지만, 지금은 최대한 서둘러 봉합한 뒤에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존재하려 노력한다. 이 노력이 반복되면 회의적이고 염세적이게 변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 관계와 직장에 대한 태도에 극명한 차이가 있다면 직장은 마음먹고 바꾸면 그만이지만, 인간 관계는 그러지 못한다. 인간이기에 그러지 못 한다. 감정이 있는 동물이기에. 특히,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형성되는 인간관계들. 가족과 형제, 그리고 소꿉 시절부터 간직해온 관계들. 힘든 시기를 함께 겪어온 사람들. 나의 자아가 형성되고, 주변 환경에 따라 성격이 굳어져가며 나를 정확히 알게 되었을 때.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가 부딪힘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피로감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어렸을 때는 나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먹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다. 교과서적인 생각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 하려면 배려와 존중, 관용과.. 이런 생각들. 그래서 꽤나 오래 '언젠가는 적응하게 되겠지, 나와 다른 누군가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라는 생각에 상대방을 끝까지 안고 가려고 나를 깎아가며 노력한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아직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겠지'라는 생각으로 내가 고쳐지고 바뀌어야 한다고 살아왔던 순간들이었다.
그러다 대체 언제까지 나를 숙이고, 때로는 감춘 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즈음에는 그 노력의 시간들이 적응보다는 실망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예 의미가 없는 시간들은 아니었다. 범주라는게 생겼다. '끌어안고 가야 해'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나만의 이성적인 기준이 생긴 것이다. 나를 '0'으로 두었을 때 적어도 앞뒤로 -1부터 1까지는 오케이. 이런 것이다. 적어도 과거의 나보다는 성숙해지지 않았나.
장점은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의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감정소모가 줄어든다는 것.
단점은 방어적이고 계산적이게 된다는 것. 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이따금씩 밀려오는 자책감.
바꾸려는 노력과 밀려오는 회의감의 첫 사이클이 돌았을 때, 밀물과 썰물의 첫 주기가 끝났을 때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나 보다, 조금씩 감정이 다스려지겠지'라고 어른팔이를 했었는데, 30대 중반이 되어가도 마음이 늘 아린다. 물론,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되지는 않는다. 불어오는 바람 따라 생겨나는 강가의 파도처럼 잔잔한 정도. 잠 못자고 힘겨워 할 정도의 시간을 보내지는 않지만, 말 그대로 마음이 아린 정도.
사랑과 이별이 연속되듯, 노력과 회의懷疑도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