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보경은 샤워기를 들고 한참을 서 있었다. 손바닥에 헤드를 대어 놓고 손날을 따라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타일에 떨어졌다 튀어오른 물방울에 발가락이 오그라들었다. 체온을 웃도는 온기가 서서히, 서서히 느껴졌다.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팔목으로, 팔목에서 어깨, 가슴, 목, 얼굴, 마침내 머리까지 물을 끼얹었다. 홀더에 샤워기를 걸어 두고 고개를 젖혀 얼굴에 늘어진 머리카락을 걷어서 뒤로 틀어올렸다가 툭 놓았다. 푹 젖은 머리 뭉치가 등허리로 쏟아졌다. 보경은 눈을 꼭 감았다. 성난 어린아이처럼 턱을 치들고 아랫입술을 위로 밀어올려 놓고 얼마간 가만히 있었다. 샤워는 느긋해야 했다. 천천히 문지르고 거품을 내고 쓸어내야 했다. 한 차례 몸과 머리를 닦아 내고 보경은 선반 앞 열의 컨디셔너를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손가락을 허공에서 까딱거리고는 대신 뒤편에 있던 머스크 향 제품을 쥐어들었다. 민혁 것이었다. 보경이 중학생 때 몇 번 쓰다 만 브랜드였는데 민혁은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같은 제품만 계속해서 썼다. 속이 거의 비어서 뿌욱 뿍 웃긴 소리를 내는 컨디셔너를 짜내어 천천히 머리칼에 문지르고 가만히 뒀다가 쓸어내렸다. 조용히 물을 맞았다.
민혁은 일 년 만에 호주로 떠났다. 그 일 년. 입원을 오래 했고 꾸준히 통원 치료를 받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었는데 이전처럼은 아니었다. 날카로움이 깎였다. 대신 주눅이 들었고 자신이 없어 보였다. 민혁은 그 외 눈에 띄게 좋아지지도 눈에 띄게 나빠지지도 않았다. 눈으로는 확실히 볼 수 없었다. 보경 아빠는 민혁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반 년 뒤부터 아들을 데리고 함께 전국을 돌았다. 먹어보지 않았을 먹거리를 맛보였다. 노지에 텐트를 치고 잠을 잤다. 낚시를 하고 산행을 했다. 가끔씩은 보경 엄마와 보경도 함께였다. 언제 한 번은 일가족 모두 설악산에 올랐다. 전날 밤은 근처 숙소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산 아래 모였다. 엄마의 요청으로 신흥사를 한 바퀴 돌고 청동불좌상 앞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설정각에서 약수물을 한 모금 떠 마신 뒤에 권금성으로 향하는 등산길에 올랐다. 케이블카 대신 등산로를 택한 것은 보경 아빠 생각이었다. 보경과 보경 엄마가 앞서고 보경 아빠와 민혁이 뒤를 따랐다. 엄마는 작은 체구로 등산 스틱을 밀어 올리면서 천천히 잘도 올랐다. 보경은 엄마가 신기했다. 자신은 등산에 소질이 없었다. 경험부터 부족했다. 경사가 가파른 코스였고 한 발 한 발 디뎌 올리기가 매우 고통스러웠다. 두어 시간 쯤 올랐을 때 발을 한 번 크게 떼어 올렸는데 몸이 크게 휘청였다. 동시에 민혁이 뒤에서 누나의 등을 턱 받쳤다. 그러고는 쑤욱 밀어 올렸다. 빨리 가 돼지야.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보경은 동생의 미소를 느꼈다.
권금성 전망대에 올라서야 보경은 허리를 쭈욱 폈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거실에서 고기를 굽던 날처럼 사방이 온통 뿌얬다. 진부하지만 신령한 기운이라는 말에 꼭 맞는 풍경이었다. 보경네는 조금 더 걸어 올라가 너른 바위 경사면에 위아래로 둘씩 앉았다. 쪼그려 모은 다리로 쏟아질 듯한 몸뚱이를 지탱해 두고 경사를 오르내리는 등산객과 희뿌연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보경 엄마는 아빠가 메고 온 가방을 열어 먹을 것을 꺼냈다. 김밥, 사과, 방울토마토, 바나나를 하나씩 들렸다. 진이 빠져 턱을 움직일 힘도 없는 보경이 엄마가 밀어넣는 김밥을 모래처럼 씹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글라스를 노란 머리 위로 걸친 외국인이었다. 익스큐즈 미. 사진, 직을수, 있어요? 여자는 화면을 켜 왼손에 든 핸드폰을 오른손 검지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보경은 아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에 든 것을 오물오물 씹으면서 스탠드 히어, 노 데어, 레프트, 라이트, 오케이, 손짓과 단어로 디렉팅을 해 가며 열댓 장을 찍어 주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더니 여자가 희색이 도는 얼굴로 보경을 보고 같이, 같이 하면서 손을 휘저었다. 보경은 민혁을 불렀다. 우리 둘이 저쪽 배경으로 찍어 줘. 민혁은 보경의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을 담은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사진을 찍고 보경은 여자가 어디서 왔는지 물었고 잠깐 대화를 나눴다. 여자는 호주에서 온 올리비아이며 친구들을 보러 한국에 두 번째 왔다고 했다. 아버지가 시드니 위쪽에서 베리 농장을 하는데 그곳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온 한국인 여럿과 친구가 됐다는 이야기를 풀어놨다. 허리에 손을 짚고 안개 너머를 쳐다보던 민혁의 눈이 그 단어에 번뜩였다. 워킹홀리데이.
그렇게 민혁은 또다시 긴 여정을 떠났다.
드라이를 마치고 보경은 팔을 내려놓았다.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양 어깨를 등쪽으로 뱅글뱅글 돌렸다. 자신의 긴 머리가 좋았지만 그래도 너무 길었다. 화장실과 집안 바닥이 늘 머리카락으로 가득했다. 이틀만 신경을 안 쓰면 거품 낀 머리카락 뭉텅이가 수채구멍 거름망에 잔뜩 엉겼다. 보경 엄마는 청소를 할 때마다 보경에게 한 번씩 싫은 소리를 했다. 귀신처럼 그만 기르고 단발로 한 번 잘라 보라고 했다. 보경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길러온 머린데. 나는 머리 길 때 가장 예쁜데. 그러면서도 혼나기는 싫어 흩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손을 닦고 화장대에 앉아 탁상용 선풍기를 틀었다. 샛노란 팬이 일으킨 바람이 두피를 시원하게 파고들었다. 라벤더가 아닌 머스크 향이 공기 중을 은은하게 떠돌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어떠한 의지든 어떠한 흔적을 남긴다.
이것이 중요했다. 민혁이 남긴 글을 진작에 봤더라면, 민혁이 집을 계속해서 나가려고 한 진짜 이유를 알았다면, 무슨 마음으로 자퇴를 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면, 쉽게 꺼내놓지 않을 마음을 미리 알았다면 유효한 대응을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지근거리에서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이 여태까지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보경은 뒤늦게야 깨달았다. 짙은 상념은 달팽이처럼 진득하게 제가 흘렀던 흔적을 남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어떻게든 그 상념이 남긴 흔적을 손에 쥘 수 있다면. 세상의, 적어도 내 주변의 비극은 확실히 차단할 수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