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멋대로 Dec 20. 2023

‘I’는 죄가 아니랍니다

2. 회사와 나, 우린 제법 안 어울려요

옆 팀 과장이 건너편 자리에서 일어난다. 화장실 가려나, 하는데 선 채로 매무새를 정돈하면서 물끄러미 이쪽을 훑는다. 가만 섰다가 웃음을 픽 흘리며 우리 팀장을 향해 한 마디 던진다.



"아휴, 팀 구성이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됐어요? 'I'들만 모였네."



얼마 전 있던 조직개편에 관한 얘기다. 팀장 주도로 열 명 넘던 팀 구성원이 다섯으로 쪼그라들었는데, 남은 인원의 조합이 공교롭다는 말이다. MBTI 테스트 결과 'I' 성향인, 즉 내향인만 우르르 남게 되어서다. 팀장은 자조적으로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야, 내가 이걸 생각을 못했어. 나눠놓고 보니까 지금 이 모양이야."



농담처럼 오간 말이었지만 입맛이 조금 썼다. 얘네를 데리고 팀 꾸려나가기 쉽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읽혔기 때문이다. I 무리를 일종의 하자로 여기는 'E' 들의 숨결이 텁텁했다. 과장의 말에 악의는 물론 없었다. 단순한 우스개소리에 불과했다.


과장과 팀장 둘은 인사이동 전까지 언제나 같은 팀이었다. 죽이 잘 맞던 사이다. 언제든 비슷한 농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둘의 대화에서 나는 내향인을 바라보는 조직 특유의 딱딱하고 모난 시각을 느꼈다. 내향인을 비교적 사회성 떨어지는 부류로, 내향성을 조직 생활의 걸림돌로 여기는 그 눈초리에 살짝 오한이 들었다.



E냐, I냐. 언제부터인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모두가 자신에 대해 설명할 때 알파벳 대문자를 하나씩 붙이기 시작했다. 외향형이면 E형, 내향형이면 I형이다. 여기에 감각형(S), 직관형(N), 사고형(T), 감정형(F), 계획형(J), 충동형(P) 등 그럴듯한 구분을 덧붙인다.


총 네 자의 알파벳 조합을 완성해 자신 또는 주변 인물의 성향을 정의하는 테스트, MBTI다. '과몰입'하는 사람이라면 J인지 P인지, T인지 F인지도 중요한 문제로 삼겠지만 역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항목은 E와 I다. 


E와 I 구분은 생각보다 중대사다. 점차 대칭 개념에서도 벗어나고 있다. 성향에 우열을 두는 시선 때문이다. 일반 기업체나 구인구직 현장에서도 주요 키워드로 자리잡아 편향된 수요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몇몇 회사에서는 구인을 할 때 이런 식의 얄팍한 문구를 덧붙이기도 한다. “매사에 쾌활하고 적극적인 E성향의 인재를 찾습니다.”


E와 I를 구분 짓는 고정관념에 따르면, E형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쾌활하며 사교적이다. I형은 외따로 있기를 좋아하고 조용하며 관계에 적극성이 떨어지는 성향으로 풀이된다. E는 사회성 좋고 무리 속에서 잘나가는 이른바 '인싸', I는 사회성 부족한 고립된 아웃사이더인 '아싸'로 나누는 무리한 구분도 존재한다.




이 같은 관념에 절여진 'E의 공격'을 받은 건 처음이 아니다. 입사 초기의 일이다. 외부에서 진행하는 회사 행사가 있어 일정을 소화하고 그 뒤 회식 자리까지 참석하게 됐다. 내 자리 대각선 맞은편에는 회사 대표의 비서 격인 인물이 앉았다.


사무실에 거의 상주하지 않았고 가끔 자리에 있을 때는 대체로 조용히 머무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는 영판 다른 모습을 보였다. 홀랑홀랑 술병을 비우더니 대뜸 말을 놓고 조금씩 꺼드럭대기 시작했다.


자신은 업무상 술자리가 동 틀 때까지 이어져도 늘 헬스장에 간다, 그러다 잠 한숨 못 자는 한이 있어도 대표님 모실 때는 정신 바싹 차리고 새벽부터 가서 대기한다 따위의 전혀 궁금하지 않은 용담을 늘어놓았다.


나로서는 별달리 들려주고 싶은 말이 없는 상대였다. 상대도 아마 내 사담에는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하하, 우와, 정말입니까, 한 잔 받으십시오, 진짜 대단하십니다 정도의 리액션을 돌려 쓰던 와중, 화제가 자연스레 MBTI로 넘어갔다.


대화에 낀 무리 여럿이 한 명씩 자신의 성향을 밝혔다. "어, I라고요?", "뭔 I예요 말도 안 돼~", "에이 거짓말 하지 마요 진짜." MBTI를 주제로 한다면 어디서나 오고 갈 법한 뻔한 대화가 오갔다. 소란한 가운데 나도 I 성향이라고 밝히고 나니, 내가 자리에서 특별히 말을 많이 하지 않았던 게 신경 쓰였는지 그가 내게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래, OO아. 너 아무리 I라도 열심히, 어? 노력하면 다 고칠 수 있어.”



나로서는 그의 말을 조금 황당하게 들었다. ‘고칠 수 있다’라. 자신이 E라고 자신 있게 밝힌 그 역시 내향성을 교정의 대상으로 바라봤다. 그 말을 곧이 따르면, 뼛속까지 내향 내성인인 나는 중요한 인성 중 하나가 선천적으로 결여된 채 태어난 환자에 다름없다. 일종의 장애 취급이다.


의문이 들지 않기가 어렵다. 조직 혹은 조직에 깊이 발 담은 사람들은 왜 내향인을 죄 뭐 하나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할까. 내가 내린 답은, 사회성에 대한 그들만의 편향된 시각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내향인은 그들이 정의하는 ‘사회성’ 측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믿는 것이다.



다수의 국내 기업과 조직에서 말하는 사회성은 내가 느끼기에 꽤 특수하다. 경색된 조직문화를 가진 집단이 정의하는 사회성이란 사전적 의미와 많이 다르다. 단순히 공동체 생활을 영위할 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군 조직과 엇비슷하다.


집단주의와 상하 관계에 거부감이 없는지, 선배와 상사 및 연장자로 대표되는 '윗사람'에게 잘 복종하는지를 두고 사회성 여부를 가른다. 쉽게 말해 소속 집단의 일을 개인의 일보다 우선하고 ‘예쁜 짓’으로 상사에게 재미를 줄 방법을 알면 사회성 좋다는 평을 받는다.


예쁜 짓은, 잔뜩 기합 찬 모습을 유지하고 시키는 일에 토 달지 않는 몸가짐이다. 여기에 애교와 넉살을 더하면 'S급' 인재가 된다.


군대식 집단주의를 선호하는 조직에서는 당연히 숫기 없이 쭈뼛대는 인원보다 유쾌하게 살랑대는 재원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MBTI는 이 둘을 구별하는 아주 간편한 잣대가 되어 주었다. 그들 입장에서 회사 생활에 도움 되는, 입맛에 맞게 부리기 좋은 아랫사람은 I가 아닌 E라는 공식이 서게 한 것이다. 



실상은 당연히 다르다. 타고 난 성격이 외향적이지만 겉돌 수 있고 사회성 떨어진다는 평을 받을 수 있다. 반대로 내향인이지만 무리 안에서 인정받고 자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경우도 많다.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E든 I든 앙상하고 제한된 결과값이다.


테스트의 공신력을 차치하고도, 외향과 내향은 공동체 속 개인의 지향 혹은 경향에 그친다. 한 인간의 가치관과 다면성, 능력을 단번에 파악하게 도와주는 기준이 아니다. 특히 업무수행능력을 판단할 근거로는 지나치게 빈약하다.


내향인만이 가진 섬세함이라든지, 특별한 능력을 나열하며 유난을 떨 생각은 없다. 그것도 모두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내향인을 곧 사회부적응자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시선이 불편할 뿐이다. 사실과 전혀 맞지 않다. I는 I대로의 매력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까 내리지나 말았으면 싶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직은 'E-편향 세상'이다. 벗어나고 싶다. 외치고 싶다.



"I는 죄가 없어요, E 사람들아!"

이전 09화 주 업무 같은 건 없단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