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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Dec 27. 2023

말 없는 사람의 사회생활

2. 회사와 나, 우린 제법 안 어울려요

“너 그거 봤어?” 


하하하. 깔깔깔.


웃고 떠드는 소리가 골목을 한참 채운다. 떠다니는 말 뭉치들이 뒤따르는 내 주변에 떨어진다. 굳이 주워담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버린다. 점심시간, 회사 밖 구내식당에 가는 길이다. 팀장과 다른 팀원들이 앞서 걷고 있다. 나는 살짝 뒤로 빠져 무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목적지로 향한다.

 


“팀장님, 이거 아세요? 요즘 엄청 유행이잖아요.”



팀에서 ‘살가움’ 역을 맡은 팀원이 끊임없이 팀장 및 예하 과장의 보조를 맞춘다. 잘 아는 화제가 나와도 나는 입을 열지 않는다. 조잘재잘 사방에 흩어지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묵묵한 걸음을 옮긴다. 어쩌다 한 번씩 나를 지목하여 물을 때만 적당히 맞장구를 친다.


만해서는 주도적으로 대화에 끼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말 없는 사람’이 팀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다. 언제나 맡은 역할에 충실한 편이다.




“너는 왜 이렇게 말이 없냐. 말 좀 해라. 답답하다 정말.” 이전 직장에서 사장은 나를 이렇게 종종 꼬집었다. 업무에 관한 질책은 아니었다. 업무에 관련된 이야기는 해야 할 말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그의 말은 다만 식사를 할 때나 회식과 비슷한 편한 자리를 가질 때 왜 사교성을 발휘하지 않느냐는, 한 단계 더 나아가서는 왜 윗사람 말에 적극 동조하며 싹싹하게 굴지 않느냐는 힐난이었다. 이런 압박에도 나는 별 대답을 않고 그냥 빙긋 웃었다. 할 말이 없었다. 애시당초 ‘편한 자리’를 한 번도 편하게 느껴보지 못했다.



어느 무리에든 넉살 좋은 사람이 존재한다. 상대를 막론하고 대화를 이어가는 데 거리낌이 없는 부류다. 순간순간 적재적소에 적확한 말을 채워 넣는 순발력 좋은 이들도 종종 보인다. 반면 한 마디를 뱉더라도 분위기를 중시하고 말을 고르는 데 꽤 긴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절대적으로 마지막 유형에 해당한다. 아무데서나 생각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는다. 상황에 겉돌거나 맞지 않는 경솔한 말을 뱉느니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때에나 조건없이 말을 않는 수준은 아니다. 대화를 나누는 상황과 상대가 불편할 때에 특별히 말을 아낀다.



내가 불편을 느끼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완벽히 낯선 사람과 마주할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위계가 형성된 사이에 대화를 나눠야 할 경우다. 우선 낯선 사람에 대한 불편은 생리적인 거부감에 가깝다. 안 친한 사람과 겉도는 대화를 나누는 자체가 그냥 싫다. 마음이 어렵다. 똥 마려운데 쌀 곳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도 이상하다. 오이와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왜’를 물어봤자 들을 말은 하나다. 향과 맛이 본능적으로 싫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낯선 이와의 부자연스러운 대면이 본능적으로 불편하다.



다음은 위계에서 오는 불편인데, 이게 주요한 문제다. 내가 정의하는 위계 관계란 단순하다. 상대는 나에게 마음껏 우스개소리를 하고 장난칠 수 있지만 나는 상대에게 장난칠 수 없다면, 위계가 형성된 관계다. 군대를 생각하면 쉽다.


선임이 장난이랍시고 후임을 골리고 약올려도, 후임이 반응할 수 있는 최대치는 허허실실 웃으며 “아이, 최병장님 왜이러심까.” 까지다. 이마저도 ‘짬’을 좀 먹고 나서의 이야기다. 갓 실무 배치받은 이병은 상병, 병장의 장난을 곧대로 맞받아치거나 너스레를 떨 수 없다.


회사에서도 사정은 같다. 팀장 과장이 나에게 자유롭게 농담을 건네고 장난을 걸어도, 내 반응에는 늘 한계치가 있다. 친구에게 받아치듯 “아휴, 개소리 말고 일이나 하십쇼.”라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하, 그런가요.” 웃는 낯으로 시시한 농담을 하나하나 받을 수밖에 없다.


그냥 적당히 맞춰줄 수 없느냐 물을 수 있지만, 상사든 선배든 불편할 만한 상대에게 사회가 원하는 수준으로 곰살맞게 구는 스킬이 내 DNA에는 새겨져 있지 않다. 때마다 얼굴 근육을 대단히 비틀어 반달 모양으로 입매를 꾸며내는 정도가 나의 최선이다.




대칭적이지 못하고 불평등한 관계 안에서 나는 농담을 잃고, 말을 잃는다. 장난과 농담은 내게 평등한 소통을 의미한다. 장난, 농담, 평등한 소통. 내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장난과 농담에서 삶의 동력과 영감, 행복감을 얻는다.


남보다 가라앉기 쉬운 성향을 갖고 태어났지만, 마찬가지로 타고난 특유의 장난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마음을 휘저어 위로 끄집어 올린다. 상보적인 성격이다. 복잡한 생각과 자기비판의 농도가 짙어질 때면 무작정 웃고 넘어갈 만한 가벼운 우스개로 희석한다. 농담은 산다는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생의 압력을 조절하는 장치다. 삐거덕대는 삶을 매끈히 조율하는 윤활유다.



그런데 통상적인 조직에서는 좀처럼 내가 원하는 가볍고 ‘평등한’ 농담을 주고받기 어렵다. 나이가 비슷하고 입사 연차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직원하고만 한정적으로 소통다운 소통을 한다.


군의 예를 끌어온 것과 같이 한 쪽이 눈치를 봐야 하는, 저는 가능한데 나는 하지 못할 말이 존재하는, 저가 한 말을 고대로 받아 했더니 맞먹으려 든다든지 기어오르려 한다고 나이와 직급으로 은연히 찍어누르는 분위기를 만드는 인물들 앞에서 나는 천연덕스레 농담을 건넬 수 없다. 나답게 말을 할 수가 없다. 실은 그러하기 싫은 것에 더 가깝다. 비극이다. ‘A급 직장인’이 되기에는 글러먹은 천성이다.




말 없는, 말 잃은 직장인의 사회생활은 녹록치 못하다.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다. 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각의 물레를 돌려 수없는 문장을 끄집고 잣는다. 얼토당토 않은 농담들을 이리저리 속으로만 치대며 방방 띄우고 저글링을 한다.


'옳지, 지금 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던져볼까' 하다가도 끝내는 목구멍을 조이고 위아래 입술을 말아붙인다. 출구가 없어 가로막힌 생각이 안에서 이리저리 추돌한다. 방에 가둬 둔 강아지처럼 꺼내달라며 속을 박박 긁는다. 문을 열 수 없어 나도 못내 답답하다.



그럼에도 끝내 입술이 벌어지도록 두지 못한다. 소통다운 소통의 부재에 목이 말라간다. 조직이 내게 불편한 것인지, 내가 이 조직을 불편하게 하는 구성원인 것인지 이제는 분간이 어렵다. 서서히 더욱 말을 잃어 간다.


어쩌면 그래,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던지지 않아야 옳을 수 있다. 방도가 없다. 누구보다 시끄러운 속내를 숨기고 조용히, 조용히 '말 없는 사람' 역에 다시 몰두할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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