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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Dec 13. 2023

주 업무 같은 건 없단다

2. 회사와 나, 우린 제법 안 어울려요

키이이이이이잉-.


원두 가는 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을 카랑카랑하게 채운다. 전자동 커피머신이 쿨룩거리며 쓴 물을 뱉어내는 동안 1리터들이 텀블러에 물을 가득 담는다.


커피와 물은 기계부품이 된 현대인의 윤활유야. 부드럽게 작동하려면 확실한 기름칠이 필요한 법이지.


자조적인 농담을 속으로 뇌까리면서 양손에 머그컵과 텀블러를 들고 탕비실을 나선다.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 참에, 출근 체크를 안 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상에 잔을 올려 두고 출입문 쪽으로 발을 돌린다.


문 옆에 설치된 단말기의 출근 버튼을 누르고 목에 건 사원증을 가볍게 태그한다. “출근이 확인되었습니다.” 새된 기계음이 들려온다.



자리에 돌아와 업무용 PC를 켜고 그룹웨어에 접속한다. 휴가를 며칠이나 쓸 수 있더라. 근태 메뉴를 열어본다. 마우스 쥔 손을 옮기다 별안간 드는 생각에 가벼운 웃음을 피식 흘린다. 전에는 휴가사용내역 한 번 파악하려거든 경리에게 따로 물어야만 했는데, 여기선 퍽이나 간편하다.


출근 체크 역시 마찬가지다. 아날로그형 펀치식 기계로 근태를 기록해 왔던 생각을 하면 이곳은 첨단 기술이 곳곳에 스며든 스마트 오피스와 다름없다. 직원 복지까지 우수하다. 탕비실엔 공짜 스틱커피와 전자동 커피머신이 있으며 녹차와 홍차까지 비치됐다.


얼음 나오는 코웨이 정수기까지 사용 가능하니, 냉온수기 물통이 텅 빌 때마다 내가 직접 교체해야만 했던 서글픈 시절은 이제 영영 갔다. 너희 일용할 물은 직접 사다 마시라는 소리를 들을 걱정도 없다. 최소한의 회사다운 체계. 새 회사에서 나를 가장 고무시켰던 요소는 다름아닌 딱 이 만큼의 체계였다.


들뜬 마음은 자연스레 업무로 옮겨 갔다. 중견급 회사라, 일에 상대적으로나마 분명한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은 회사와 확연히 다른 기술적 시스템과 업무 처리 과정 같은 것 말이다.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전자결재 시스템이나 곳곳에 직원 전용 회의실이 갖춰진 것만 봐도 뭔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하고 똑 부러지게 효율을 추구하면서 구성원의 창의성을 최대한 저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럴듯한 의사결정이 오고갈 것만 같았다. 조직도가 빽빽한, 규모 있는 기업은 어떻게 일을 할까. 늘 궁금했다.




맡기로 한 새 업무는 말만 들어선 이전과 어느 정도 비슷해 보였다. 결국 회사가 진행하는 주류 관련 신사업 프로젝트에 살을 채우는 일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잡지 기사를 구성할 때처럼 콘텐츠를 만들어 채워 넣으면 되겠구나 했다.


전처럼 다달이 실물 책을 내는 작업도 아니고, 주말에 출근해야 한다는 부담 역시 없으니 한결 편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하게 된 업무는, 생각과 많이 달랐다. 주 업무로 알고 있던 일의 비중은 10%에 지나지 않았다. 그 외에 생전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홈페이지 기획부터, 회사가 보유한 특정 브랜드 홈페이지들의 팝업 관리 등을 해야 했다.


더해서 팀으로 들어오는 잡일에 가까운 업무 ‘짬처리’를 고루 맡았다. 돌연 SNS 파트에 소속되어 SNS 게시글 업로드를 위한 조수 격으로 쓰이기도 했다. 브랜드 매장을 오가며 사진을 찍어 오고 신체 모델을 하는 등 소화해야 하는 업무도 정신 빠지게 많았다.


동시에 팀장이 툭 툭 던져주는 업무는 1순위로 쳐내야 했다. 특정 사안에 관련된 내용을 찾아서 달라고 팀장이 구두로 깜짝 지시를 내리면 즉각 모든 업무를 멈췄다. “그보다 지금 이 건이 지금 좀 급한데, 이것만 마무리하고 조금 뒤에 찾아 드려도 괜찮을까요?” 같은 말을 할 분위기는 팀 내에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명이 떨어지면 즉각 ‘무한 구글링 작업’에 착수해야 했다. 대체로 단순한 키워드 검색 수준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때마다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혔다.


그동안 후순위 업무는 끊임없이 쌓여나갔다. 업무로 일종의 디펜스 게임을 하는 듯했다. 살려면 쳐내야 하고, 못 쳐내면 게임 오버다. 그렇지 않아도 색 없던 얼굴이 더욱 총기를 잃기 시작했다. 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왜 나한테 이런 걸 시키는 걸까, 왜, 왜.


평온한 마음을 부단히 침략해 어지럽히는 ‘왜’놈들과 맞서 싸웠다. 일 처리를 위해 본격적인 야근에 돌입했다. 얼마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아직 적응을 못 해서 어색한거야 하며 주어진 일을 충실히 따라가 보려 애썼다.



시간은 참 잘도 흘러갔다. 사무실 한 켠에 자리를 잡은 지 일곱 달은 지났다. 이상했다. 바뀌어야 하는데 여전하다.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하루를 찬찬히 돌아봐도 내가 대체 어떤 업무를 쳐냈는지 정리하기 어려웠다.


업무 능력이 남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게 아닐지 타고 난 자질을 의심할 즈음, 입사 동기 격인 팀원과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생겼다. 듣고 보니 그도 똑같았다. 마찬가지로 굉장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자신만 적응을 못 하는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제야 뒤늦게 깨달았다. 이곳은 회사로서의 형식적인 기본 체계만 갖췄을 뿐, 업무 체계는 엉망인 곳이었다.



내가 속한 팀이 일하는 방식은 딱 ‘노가다 팀’ 그 자체였다. 건설 현장에서 원청의 요구에 따라 팀 단위로 다양한 노무를 제공하는 기초 건설노동자 무리처럼, 회사가 던지는 지시사항대로 팀장이 소속 팀원을 이 현장에 꽂아 돌리고 저 현장에 보내 마구잡이로 돌렸다.


유기적인 소통은 전혀 없다시피했다. 팀원 따위가 감히 업무상 큰 그림을 그릴 엄두를 낼 수 없는 구조였다. 프로젝트는 예고 없이 자주 바뀌었고, 팀 내 업무 경계가 흐릿하여 팀원은 자신이 언제 어느 업무에 투입될지 몰랐다. 그저 명령이 하달되면 빠릿빠릿하게 열의를 다한 몸짓을 내보여야 할 뿐이었다.



나의 주 업무라고 생각했던 콘텐츠 생성도 원활히 해내기 어려웠다. 콘텐츠를 담을 온라인 플랫폼부터 온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플랫폼에 대한 아이디어를 던져야 했고 콘텐츠를 짜기 위해 고민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 생각해봐도 무엇을 했는지 모를 정신없는 일일 업무를 쳐 내면서 그럴 듯한 아이디어를 끌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실 제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자리에서, 나는 한 차례 팀장에게 현재 나를 지배하는 고민에 대해 털어놓아 버렸다. 팀장은 소통에 관심이 많은 인물은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며 그와 형식적으로나마 정식 면담을 한 횟수는 두 차례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회사생활을 계속 이어나가려면 상급자와 대화를 나눠 볼 필요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한 가지 업무만 맡게 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주 업무와 부 업무의 경계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전에 다니던 곳에서도 이일 저일 잡일 다 했지만 그때는 적어도 업무 경계가 또렷해서 혼란에 빠지진 않았는데 지금은 정체성이 흔들릴 지경이다, 방향성을 잡고 싶다, 솔직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은 팀장은 나를 가만 보았다. 이윽고 싱겁도록 가벼운 어조로 받아쳤다.



“우리 팀에는 주 업무라는 게 없어. 나도 내가 지금 무슨 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냥 이일 저일 들어오면 다 해야 돼.”



쭈뼛쭈뼛 풀어내 본 고민의 타래가 다시 정신없이 엉키었다. 잠시 사고를 멈췄다. 업무의 방향과 체계를 아예 부정당해 버릴 줄은 몰랐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니. 나는 자조적인 의미에서의 기계 부품이 아니었다. 정말 사무실 내에 설치된 커피 머신과 출입 단말 기기와 같은 처지였다.


사를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드는 묵묵한 부품, 머릿수 채울 일 명의 인력에 불과했다. 힘이 빠졌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건 정말 이상하네요. 이 정도 체계가 없다니요. 최소한 주요 업무는 가지고 가야지요. 차마 덧붙일 수 없었다.




“아, 그런가요? 그렇군요..”



정말로 기계가 된 듯 삐걱대며 눈을 살짝 내려깔고 맥없이 대답했다. 무슨 말을 더 해야할 지 몰랐다. 조직과 팀 내에 통용되는 ‘상식’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흘려보낸 수 개월은, 적응을 위한 시간이라 볼 수 없었다. 부지불식간 스스로를 무력한 부품으로 적응하게 하는 튜토리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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