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멋대로 Nov 29. 2023

건실한 청년

1. 조직 부적응자

입안이 깔깔하다. 생기 없이 메마른 점막을 부석부석한 혀로 슬쩍 훑어낸다. 밤사이 오장육부에 묵은 독기를 한숨에 섞어 푸우 뱉는다. 술로 마취하는 흐리멍덩한 일상이 한번 더 시작된다.


오늘은 어제의 복사본이다. 자기 테이프처럼 덧씌울 때마다 희미하게 늘어지고 닳아간다. 노이즈 낀 듯 부연 시야에 든 방 안이 답답하다. 뭉개어지고 마는 묵묵한 하루가 맘에 들지 않는다. 갈 길을 잃었다. 목적지를 모르는데 서둘러 다음 발을 내딛을 자신이 없다.



한 해를 꼭 한 달 남겨두고 또 다시 자발적 무직자가 됐다. 데자뷰처럼 조직에서 튕겨져 나왔다. 멋대로 사는 삶은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든다. 스스로 인생의 정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나의 방식은 불쾌한 비쭉임이다. 나를 반듯하게 다듬지 못해 안달이 난 주변과 때마다 마주해야 한다.


대체로 피로한 일이다. 걱정을 빙자한 힐난과 뜯어보는 시선이 주는 압력에 없던 자굴지심마저 밀려올라온다. 맞서기보다 외면하거나 흘려보내고 피하는 쪽이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쉽지는 않다. 고립과 침묵 속 스스로의 생각에 먹혀 마침내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무얼 위해 걸어온 길인지 혼란에 쉽게 빠진다.



자랑스럽게 내보일 만한 삶에 대해 생각했다. 이른바 ‘건실한 청년’이 되는 일이다. 중언부언 수식 없이 나 무슨 일 합니다, 어디 소속입니다 정도 한 줄짜리 소개로 듣는 이를 주억대게 하는 또렷한 일자리를 잡아 진득하게 엉덩이 붙이고 버티어 낸다면, 나는 연령을 불문한 누구에게나 건실한 청년으로 비춰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리 보여야 할 필요성은 무엇인가. 그럴듯한 이유를 몇 떠올려 본다. 하나, 나잇값을 해야 하기 때문에. 둘, 주변에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셋, 그냥 그렇게 사는 삶이 옳고 이상적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눈 밖에 나지 않고 그들 사이 입방아에 찧이지 않기 위해. 읊어보고 나니 어쩐지 모두 서글픈 생각이다.



나는 도무지 인생에는 정답을 내고 싶지 않았다. 오지선다 문항에 답안 표시를 하듯 콕 콕 옳은 것만 집어내려 하는 삶에 대한 회의다. 게다가 애써 답이랍시고 골라 놓고도, 자신 인생의 채점을 스스로 않고 남에게 맡기는 방식이 싫었다.


중론을 거스르는 답안에 빗금을 그어 사정없이 비를 퍼부어 버리는 '채점자'들의 잔혹함이란. 축축히 젖어 너덜거리는 인생 영역 시험지를 받아 든 비참한 심정을 감내하며 사는 인간이 표준형이라면, 나는 차라리 규격 외 인간이고 싶었다. 내 나름대로의 행복을 멋대로 찾아 좇고 싶었다.



이상과 현실을 오가며 나의 쓸모를 두어달 고민했다. 일종의 타협이었던 취업에 대한 실험은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다음은 뭘까. 어느 흐름에 나를 맡겨야 할까. 색도 모양도 무게도 다른 생각의 조각이 널부러져 층층이 쌓였다.


안으로부터 스미는 무력감과 자괴감이 나를 검게 적셨다. 확신이 차츰 사라졌다. 호기롭게 늘어놓았던 행복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일이 요원해 보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흐물해진 일상을 그저 꿈속처럼 떠돌며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시간을 유예할 뿐이었다.




대체로 흐리터분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영문 모르게 정신 또렷한 날이 있다. 녹빛 이끼 그득한 외진 구석에 어룽대는 볕처럼, 눅눅한 일상에도 이따금 따스한 기운이 찾아든다.


일이 풀린 방식은 조금 엉뚱했다. 뜻밖에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갑작스레 찾아와 내려쬐는 온기가 좋아 나는 자못 단단하게 세워둔 벽을 아예 허물었다. 찬연한 빛을 끌어들여 막막한 그늘을 몰아내어 버렸다.


만난 지 이틀만에 우리는 결혼이라는 주제를 입에 담았다. 인생이 하루아침에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다다랐다. 전에 없던 ‘건실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새 술을 빚을 참이니 이제 새 부대에 담아내고 싶었다.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갔다. 술을 다루는 특정 과정을 찾아 이수하고 관련 자격을 취득했다. 포토샵 등 실무에 쓰일 법한 기초적인 소프트웨어 활용 기술도 새로 익혔다. 일자리를 염두에 두고 또다시 무어라도 하다 보니 조금 조바심이 났다.


생활비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결혼이 갖는 특수한 성질도 나를 채근했다. 머릿속에 담아 놓을 때보다 입밖으로 꺼내놓았을 때 갖는 무게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무거웠다. 곧 일을 해야겠는데, 전과 같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빈털터리 개차반이더라도 정신만 또렷하면 결혼할 수 있다 생각해왔지만, 우습게도 체면이라는 얄궂은 개념에 골몰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즈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한 회사에서 술에 관련한 새로운 직책을 마련하여 적임자를 구하고 있었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중견기업의 공고였다. 업무 내용을 보니 전에 했던 일의 연장선이었고 정확히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군침이 싹 돌았다. 직간접 종사자가 800여 명에 이르는 회사에서 일하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에 이만큼 어울리는 자리가 또 있을까.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조직 생활 사회 생활이 잘 맞지 않아 어쩌고 저쩌고, 더는 모르는 일이다.


교육받던 기관을 통해 추천을 받아 지원을 마쳤다. 며칠 뒤 면접 요청이 왔다. 호재다. 비대면 면접까지 끝냈다. 이제 최종 통보만 남았다. 카페에서 구인 정보를 훑으며 또 며칠 시간을 보냈다. 세상의 모든 그늘을 걷어낼 듯한 기세로 해가 점점 길어지던 초여름 무렵, 마침내 전화기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최멋대로님, OOOOO 인사팀이에요. OO팀 입사면접에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300대 1에 가까웠던 지원 경쟁을 뚫고 자리를 꿰찼다.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이제 비로소 건실해질 시간이 온 거야. 채점 한 번 받아보지 뭐.‘

이전 06화 이 정도면 감지덕지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