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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Nov 22. 2023

이 정도면 감지덕지야

1. 조직 부적응자

1년 7개월이었다. 전 직원이 열 명도 못 되는 소규모 회사에서 이 정도 소소한 경력을 채운 것으로 내 두 번째 도전은 끝이 났다. 선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사태에 선장 격 되는 양반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였다.


시키는 대로 앞만 보고 죽어라 노를 젓던 선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돌연 배가 가라앉게 생겼으니 너희 몸이라도 구겨 넣어 막으라는 태도에 말을 잃었다. 절대 탈출하지 말라고 다그치며 회유하는 선장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대다수 구성원이 사의를 표했다.


법망의 테두리에서 아주 헐값에, 때로는 공짜로 갖은 노무를 제공해 온 데 대한 치하는 끝까지 들을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그의 말마따나 ‘생각 없고 한심하며 괘씸한 놈들’에 지나지 않았다.



일은 제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날마다 기쁨과 환희가 가득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출근을 손꼽아 기다리고 퇴근이 아쉬웠을 리는 없다. 최소한 기대한 만큼의 소소한 보람을 얻긴 했다는 말이다. 내가 회사에 기대한 바는 놀라우리만치 이것이 전부였다.


객관적인 지표로만 보면 ‘마른 걸레도 짜면 물이 나온다’ 정신으로 주먹구구식 운영을 이어가는 소기업에 불과한 곳에, 많은 걸 바라기도 어려웠다. 알고 들어왔기에 연봉이나 처우에 대한 기대는 진작에 버리고 소소한 만족감만 바라본 것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직장인인가.



잡지 일 자체가 사실 낭만 그 자체에 가깝다. 박봉에 격무인 환경을 무릅쓰고 저마다의 가치를 좇기 위해 뛰어든다. 최상위 학벌이나 대기업 출신이라는 휘광을 두르고도 기꺼이 이 험지로 뛰어드는 이들도 과거에는 적지 않았다.


대개 자부심 하나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를 능력이 안 되어 박한 취급을 감내하고 일해야만 하는 처지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에 대한 애정과 최소한의 자존심들이 있다는 소리다.


가여운 잡지쟁이들이 연봉 인상이나 처우 개선에 대한 의견을 꺼내려다가도, “야, 회사 요새 힘들어. 너도 이 바닥 굴러가는 상황 알잖아?”하는 사장의 범박한 앓는 소리에 종종 쉽게 넘어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에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 순수한 마음을 붙들고 그래 이거면 돼.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를 타이르기 때문이다.


보람 하나만을 보고 시작한 일이기에 목표한 만큼 버티려거든 나에게도 이러한 자기 세뇌가 필수였다. 여기에는 ‘감지덕지 전략’이 주효했다. 전과 비교해서 여긴 어떻냐는 선배의 말에 “여기는 화장실이 넓고 현대적이어서 참 좋네요”라 대답했다.


선배는 황당해했지만, 실로 감지덕지였다. 이전 회사는 아주 낡은 건물에 자리했다.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층계참에 있는 한평 남짓한 남여공용 뿐이었다. ‘쪼그려 싸’ 자세를 취해야 하는 재래식 스타일 변기와, 세면대에는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트는 옛날식 불투명 수도꼭지가 달린 곳이었다.


온수 꼭지가 별도로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한겨울에는 야외와 다를 바 없이 냉기가 돌아 양치질 한 번 하려면 대단한 기합과 각오가 따랐다. 얼음보다 차갑게 느껴지는 물에 손은 물론 입 안까지 꽝꽝 얼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난방이 가능하고 양변기칸이 세 칸이며 뜨거운 물 잘 나오는 세면대도 세 대나 구비된 화장실이라니. 감지덕지다.


게다가 마감을 할 때 적어도 막차가 끊기기 전에는 집에 보내 준다니. 최고다. 날마다 새로운 와인을 맛볼 수 있다니. 천상의 복지가 따로 없다. 한겨울에 목장갑 끼고 직접 20리터 등유 말통을 들어다 기름 난로에 연료 주입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감지덕지지.


 작디 작은 소기업에서 벌어질 법한 온갖 불합리한 사안과 기이한 업무처리방식을 날마다 마주하면서도 전에 비하면 감지덕지라는 생각을 꿋꿋이 이어가며 솟아오르는 불만을 용케 마취했다. 몇년 전 정규직 일곱 달 일해본 경험도 경험이라고, 똥인지 된장인지 가려 볼 정도의 심미안이 생긴 듯 굴었다.



‘여긴 똥 냄새나는 된장 같은 곳에 가깝지, 똥은 아니야. 적어도 된장이기는 하지 않냔 말야. 전에 비하면 이게 어디냐, 이게 어디야.’



그런데 가까스로 두 발 딛고 선 곳이 견고한 바닥이 아닌 진창이라면, 이 짓도 오래는 못 한다. 걸음을 딛을 때마다 푹 푹 꺼지는 발은 단순한 자기암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새로운 길과 의미를 향해 한 걸음씩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은 어느 순간엔가 늪의 한가운데에서 가라앉고만 있었다. 월급은 어느새 기약 없이 10% 삭감되었고 퇴사한 팀장급 인원의 자리도 채워지지 않았다. 팀장 없이 팀을 꾸리라는 말과, 회사가 어려우니 직원들도 기꺼이 불이익을 감내해야 마땅하다는 기괴한 명을 듣고 나니 머리가 멍했다.



모두를 분노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사무실 내 냉온수기용 생수통 주문을 끊어버린 일이었다. 앞으로 물 정도는 알아서 사 마시라는 말에 넋이 나가버렸다. 노동인력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커녕, 근로자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얼이 빠졌다.


“하다못해 매일같이 다른 사람이 들락거리는 인력사무소에 가도 물이랑 믹스커피는 줍디다.”


당장에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실제로 우리 사무실에는 탕비실조차 없었다. 믹스커피나 녹차는 구경도 해 본 일이 없고, 그저 냉온수기 하나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마저 뺀다고? 말 같지 않은 소리.



어처구니 없는 통보에 잔뜩 독기가 오른 팀원들과 머리를 모았다. 얼마 뒤, 건의를 빙자한 항의를 전달하기 위해 다대일 면담을 요청했다. 모두가 회의실에 자리하자마자 일련의 사태에 대한 우려와 업무 정상화를 위한 몇 가지 건의사항을 꺼내 놓았다.


우르르 몰려 온 직원들에 기가 꺾인 사장은 생수통 건에 대해선 꼬리를 내렸다. 다만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강하게 거부의 뜻을 내비치며 여느 때와 같이 일장연설에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회사 경영에 대해서 너희들은 일절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지금 회사가 좋은 상황은 아니지만 당장 정리하면 집 한 채에 더해 고작 몇 억밖에 나는 못 건진다’, ‘그러니 나도 너희도 회사가 되살아 날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는 말을 덧붙였다.

 


망언에 가까운 황당한 소리에 별안간 기가 찼다. 직원 개개인에 대한 걱정이나 미안함은 조금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직 본인이 일군 회사와 자산만이 관심사이며, 낯부끄럽다는 사고 과정 없이 그러한 생각을 직원 앞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도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사장님은 회사가 망해도 그 몇 억 원이나 있네요? 우린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회사 상황을 걱정하는거 아닙니까.”



참지 못하고 따지고 들었다. 어디서 그따위 말대답을 하느냐며 노발대발하는 목소리가 날아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할 말을 했다. 두 번째 직장을 잃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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