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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멋대로 Nov 15. 2023

술 쓰는 사람

1. 조직 부적응자

술에 대해 쓰는 사람이 될 거야. 막연한 다짐은 현실이 됐다. 연봉이 이러니 저러니 늘어놓던 푸념은 어느새 배부른 소리가 되어 휘발되었다. 소회와 기대가 대신 그 빈 자리를 채웠다.


자칭 ‘방구석 술덕후’ 수준에 그쳤던 내가, 두 번째 취업을 통해 번듯한 직업적 술쟁이로 거듭나게 됐다. 감정이 기분 좋게 요동쳤다. 없는 돈 털어 술에 붓다 보니 술이 내게 기름 붓는 날도 오는구나. 주酒님, 감사합니다.


충만한 은혜가 몸을 휘감았다. 술에 대한 열망이 결국 앞길을 터 주었다. 좋은 술을 알리고 술에 얽힌 편견을 깨고 싶었던 작은 열망. 그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던 때를 문득 떠올렸다.




“먹고 죽자!” 대학 신입생 시절, 술은 언제나 먹고 죽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배웠다. 많이 마시면 박수를 받고, 자주 마실수록 ‘인싸력’이 높아진다 했다.


나는 교복 벗은 지 고작 한 달 된 신입생. 하늘같은 선배의 말을 걸러 들을 용기도, 요령도 없었다. 날마다 불나방처럼 술에 달겨들었다. 과음으로 푸석해진 얼굴과 퀭하니 음영진 낯빛은 훈장이었다. 수업이 끝나도 술, 수업이 없어도 술, 시험기간에도 술, 시험을 마쳐도 술.


알코올에 절여진 한 학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어김없이 초록 병으로 간을 폭행하던 어느 밤, 근원적인 질문이 머릿속에서 꿀렁거렸다. ‘내가 이런 걸 대체 왜 마시고 있지?’


본능적인 회의감이 일었다. 술을 이런 식으로 마셔야만 할까 하는. 당시 주변 사람 대부분은 술을, 취하기 위해 쓰고 역한 맛을 참고 마시는 약물 수준으로 인식했다. 안주란 술로 텁텁해진 입맛을 가시어 내기 위해 먹는 음식이었다.


모두가 술을 그저 취하게 만드는 것 외에 존재 의의가 없는 듯 취급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술이 가진 모습은 그게 다가 아닐 것 같았다.



내 눈을 틔운 첫 술은 막걸리였다. 비오는 날 찾게 되는 분위기, 찌그러진 잔에 부연 젖빛 술이 채워지는 감성. 막걸리는 달달하고 구수한 맛에, 분위기와 감성까지 가진 술이었다.


기름지고 매콤한 안주와 잘 어울리는 달짝지근함 역시 좋았다. 이런저런 음식과의 조합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술은 단지 먹고 죽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술이란 음식과 묘한 시너지를 이루며, 화학적인 작용에 취하지 않아도 분위기에 취하게 만드는 음료가 아닐까 생각했다. 막걸리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자연스레 술 맛, 좋은 맛을 내는 술에 관심이 갔다. 술이 가진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술에 대한 지식과 저변을 계속해서 넓히고 싶었다. 우선 비교적 접근성이 좋은 맥주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수입 맥주 시장이 조금씩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시간을 들여 여러 종류를 맛봤다.


바이젠, 복, 벨지언 화이트, 트라피스트, 스타우트, 필스너, 페일 에일, IPA, 람빅 등 다양한 맥주를 찾아 마셨다. 각 스타일이 갖는 특징과 맛이 모두 달랐다. 음식과의 궁합도 의외였다. 치킨과 튀김에 한정되지 않았다. 맥주 역시 와인처럼 음식과 다채롭게 짝을 이루는 술이었다.



친근하게 느꼈던 맥주도 속을 들여다보니 한 길이 아니었다. 더 많은 술이 궁금해졌다. 각자가 가진 맛과 향이 음식과 어떤 조화를 이뤄 낼지도 알고 싶었다. 발효주는 증류주든, 리큐르든 주정 강화 술이든 가리지 않고 찾아 마셨다.


주류 시음회에 참석하고 전통주 현장 특강을 찾아 들었다. 음식을 먹을 때면 항상 여기에 어울리는 술이 뭘까 생각했다. 술을 마시기 위해 음식을 먹었고, 음식에 맞추기 위해 술을 찾았다.



술은 곧 내 삶의 필수요소가 됐다. 술에 취하기보다, 좋은 술을 찾아 마시는 데서 기쁨을 얻었다. 드디어 진정으로 술을 즐기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술을 ‘잘 마신다’는 표현을 달리 생각하게 됐다.


무작정 많이 들이붓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맛과 분위기를 충분히 즐길 줄 알아야 했다. 술을 잘 마신다는 말은 이런 때 붙여 마땅한 수식이었다.


음식을 준비해서 그에 잘 맞는 술을 구해다 함께 먹는 일이 일상이 되었을 무렵, 친구들을 만나면 새로 알게 된 좋은 술을 권하며 맛보여 줬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술에 대한 흥미를 유도하기도 했다. 제대로 맛 보는 한 잔 술의 기쁨을 모두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10년 가까이 사로잡혀 있었다. 마치 ‘좋은 술 전도사’라도 된 양.




새 명함이 나왔다. 노동의 굴레에 재차 몸을 던진 지 어느덧 한 달. 잘못 문지르면 잉크가 번질 듯 매끈한 명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와인 전문지의 취재기자이자 에디터라는 직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바라던 대로 술을 알리는 사람이 되었구나, 새삼 실감했다. 일종의 ‘덕업일치’를 이룬 데 대한 자긍심이 불룩 솟았다. 슬슬 다시 김칫국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여긴 어쩌면 5년은 더 굴러먹을 만한 바닥이지 않을까. 지난번하고 달라. 원하던 환경이랑 상당히 비슷하잖아. 못 할 건 또 뭐냔 말이야. 돈 생각만 좀 덜 하면..’



술을 주제삼은 커리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어 아주 만족스러웠다. 잘만 하면 보람과 성취감이라는 이상을 좇아볼 수도 있을 듯했다. 지난 실패를 불러온 쓰라린 현실은 죄 망각한 채 다시 꿈에 퐁당 빠져들었다. 또 한 차례 자기세뇌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와.’ 만 1년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무난히 보냈다.


그제야 안도했다. 흐름을 보면 처음에 생각한대로 몇 년은 더 쉽게 버틸 수 있으리라. 이제 안정적으로 적당한 커리어를 쌓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인생은, 가만 보면 좀스러운 건달 같은 구석이 있다. 만만하게 본다 하면 돼먹잖은 몽니로 나동그라뜨리기를 즐긴다. 잘 다닌다고 생각했던 회사는 할 만하다 생각할 즈음부터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월급은커녕 정수기 물조차 받아먹지 못할 위기를 겪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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