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로 인한 발견

by 김환




"꽃다발은 가격이 어떻게 하나요?" 의도한 건 아닌데 경이를 만나는 내일은 로즈데이다. 로즈데이는 연인들끼리 장미꽃을 주고받는 14일의 상술 데이이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꽃'이라고 하니. 그런 상술에 한번쯤은 넘어가고 싶다.





대학 동기인 경이는 대학 졸업 후 유일하게 연락하는 동기인 동생이다. 고졸 취업으로 일 년을 일하다가 대학에 들어온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후배이기도 하다.


대학교 신입생으로 등교한 첫날 만들어진 반톡의 동기들의 프로필을 구경하다 눈에 익숙한 교복을 발견했다. 3년 내내 내가 입던 그 교복. 아 얘랑 나랑 같은 고등학교였나 보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입학한 거겠지? 그럼 고등학교 후배랑 동기인 거네. 남들보다 1년 늦은 나는 어린 동생들과 동기가 되려니 조금 낯설었다. 조기취업으로 취직했던 직장에서 전 직원을 통틀어 막내였던 내가 더 이상 막내가 아니라니. 일 학년이 스무 살이 아니라니.


어색한 언니, 누나 호칭과 쉽사리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 속 경이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공통점으로 안면을 틀 수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대학교에서 학연 지연 혈연을 느꼈다. 애살없이 정 많은 성격의 경이는 동기들 뿐만 아니라 선배들과의 사이도 좋았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새로 입학한 후배와도.


같은 반, 같은 동아리, 같은 실습지. 내 대학생활의 어디에도 경이가 있었다. 졸업반 널널한 교양수업에 나를 소개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게 한 학기 수업이자 과제였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나는 봉사 사진이나 대학교 행사 사진들을 경이 핸드폰에서 넘겨받아 만들었다. 경이는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이런 사진들을 모아 기록하고 꾸미는 걸 좋아해 나와 같이 찍은 사진도 많이 있었다.


만우절이면 이제는 술살이 쪄 단추는 잠기지 않아 지퍼만 간신히 올린 교복을 입고 벚꽃놀이도 가고 병원 실습이 끝나면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즐기러 국내여행을 떠나고. 대학 졸업 기념 겸 취직 첫 출근하기 전에 학생 때부터 노래를 부르던 해외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참 많은 걸 함께 했네.


언제까지나 20살인 줄 알았던 경이도 나를 따라서 나이를 먹었다. 예쁜 나이 25살을 지나 조만간 경이도 나도 20대를 졸업하게 생겼다. 일 학년 때 그렇게 경악 했던 화석 선배의 나이를 뛰어넘은지도 오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러 서울로 올라온 나는 가끔씩 경이가 보고 싶다.




서울도 부산도 아닌 경주에서 의도하지 않게 로즈데인 주말에 경이와 만난다. 매일이 별 볼 일 없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이 지겨워져서 특별하고 설레는 하루하루가 필요했다. 경이와 휴가를 맞춰서 제주도에 가고 싶었는데 이게 또 맞추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행도 하고 싶고 집에도 가고 싶고 경이도 만나고 싶고. 본가인 부산도 들르기 쉽고 여행 느낌도 나는 곳인 경주로 경이를 불렀다. "니 내랑 경주 갈래?"


나는 목요일 저녁에, 경이는 금요일 저녁 경주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경주까지 한 시간, 버스비 8,600원. 부산 근교인 경주에 경이는 여러 번 놀러 온 적이 있다. 황리단길을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나는 경주를 맘껏 여행하기 위해 연차 써서 하루 일찍 내려왔다. 경이는 만남의 장소인 서면에서 저녁을 먹고 옆동네 전포에서 커피 한잔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고정적인 만남을 하는 것처럼 직장 퇴근하고 경주에 왔다.


혼자서 황리단길 골목골목을 걸어 다녔다. 경주스러운 엽서를 파는 소품샵과 인스타 팔로우하고 있던 독립서점. 지갑 털어가지 좋게 생긴 가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한 바퀴를 빙 돌고 나서 초입부에서 지나쳤던 꽃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일이 로즈데이라 그런지 꽃집에는 연인을 보이는 손님 몇 커플과 분주하지만 시원스러운 손동작으로 꽃송이를 포장하는 플로리스트. 꽃이 예뻐서 그런가. 누군가을 위한 마음을 눈에 보이는 꽃으로 만들어낸다는 것만으로도 예뻐 보였다.


경이에게 선물할 꽃다발을 사러 들어는 왔는데 꽃다발을 한 번도 골라본 적이 없는 나만 그 꽃집에서 멈춰있었다. 로즈데이기도 하고 경이는 짙고 화려한 장미가 어울리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잔꽃은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어떻게 꽃을 조합해야 할까. 어떤 꽃이 경이에게 어울릴까. 고민하는 새 직원이 다가왔다.


원하는 메인 꽃을 골라주면 어울리는 배경 꽃을 엮어(?) 보여주시기도 하고 짝꿍인 꽃 조합을 추천받았다. 최종으로 고른 꽃을 다듬고 이리저리 뭉쳐 들꽃 같았던 엮은(?) 꽃 뭉치가 거침없는 현란한 손길에 내가 아는 꽃다발이 되어 내 손안에 도착했다. 필요 없는 잎을 떼어내고 움직이지 않게 한데 묶어 한 번의 가위질로 반듯하게 자른 포장지를 장인의 손길로 끄트머리를 살짝 구겨 탄생하는 꽃다발을 지켜봤다. 예쁜 꽃에 예쁜 꽃을 더하니 예쁜 다발이 나왔다. 장미 없는 로즈데이 꽃다발. 장미 대신 메인으로 고른 데이지과 꽃이 그 꽃집에서 경이를 가장 웃게 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금요일 로즈데이 저녁. 경이를 데리러 터미널로 나갔다. 마지막으로 본 게 설이었던 겨울이었으니. 한 계절이 지나 봄과 여름 사이에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경이는 이별 다이어트의 효과로 얼굴이 반쪽이 됐다. 점점 날렵 해지는 턱선에 본격적인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에 흥미를 붙으고 곧 복근이 완성될 것 같은 몸이 되어 왔다.


예약한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기 시작할 때 주방, 맥주컵에 담가놓은 꽃다발을 등 뒤에 숨기고 경이에게 다가갔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짐을 풀다 말고 나를 돌아보자마자 숨겨놓은 꽃다발을 경이에게 건넸다. 안 그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경이의 얼굴에서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더니 "이거 내 거야? 진짜?" 로즈데이잖아. 그래서 준비해봤어. 경이를 웃게 해 주려 준비한 꽃다발인데 오히려 행복해하는 모습에 괜스레 내가 더 뿌듯하고 웃음이 비실비실 삐져나왔다. 돌고래소리를 내면서 좋아라 하는 경이.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때 졸업식에도 선물해야 했는데.


대학교 졸업식날 온 가족들에게 내 졸업식에 꽃다발을 사들고 오라고 졸업식 한창 전부터 들들 볶아댔다. 입학식은 몰라도 졸업식엔 꼭 와야 하고 꽃다발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어야 내 졸업식이 완전하게 끝난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졸업식이 마지막이다 보니 초, 중, 고 졸업식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모아 모아 이렇게 집착하게 됐나 보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거라곤 연년생이었던 우리 집 둘째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가족끼리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고서야 왜 내 졸업식 사진은 없나? 싶은 의아함만 남았다. 중학교 졸업식에는 타지에 있던 부모님과 군대 간 첫째. 그래서였는지 고등학생이었던 둘째가 수업 조퇴하고 내 졸업식에 와줬다. 비가 왔던 졸업식날 둘이서 우산들 같이 쓰고 집으로 돌아가길에 친구랑 짜장면 사 먹으라고 용돈을 쥐어준 기억이 있다. 아마 학교 수업 짼 것 같다. 고등학교 졸업식엔 둘째가 군대를 갔다. 그래서 마지막인 대학교 졸업식에서는 모두가 꼭꼭 와야 한다고 들들 볶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에겐 졸업식 행사가 끝날 때쯤 오라고 말했다. 졸업식은 학사모를 던지며 찍는 사진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졸업 식순은 하나도 흥미롭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경이와 졸업가운과 학사모를 빌리러 행사장에 가는 길에 꽃다발을 파는 화려한 좌판들이 끝없이 모여있었다. 경이는 한 좌판에 서서 노란 꽃잎이 만발한 프리지아 다발 가격을 물었다. "한 다발에 5천 원이에요" 자신의 졸업식 꽃다발을 손수 준비하는 경이 모습을 보고 괜히 마음이 쓰였다. 그 당시 트렌드였던 목화솜도 없고 메인 꽃, 배경 꽃 구분도 없이 오로지 프리지아로만 엮은 꽃다발. 5천 원.


내게 졸업식은 마지막 가족 이벤트였고 경이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순간 동기로서 언니로서 친구로서 든든하게 "내가 사줄게!" 말을 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매년 돌아오는 12월 경이의 생일에도 그랬고, 의도치 않게 로즈데이에 만나는 이번에도 그랬다.




광안리 바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사는 경이에게 광안리 바다를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바다를 걷고 바닷바람을 쐬고 바닷물에 발음 담가 노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면서 광안리 주민과 동네 여행을 했다. 부산스러운 엽서를 찾아 소품샵 도장깨기를 하고 그러다 퀄리티 좋은 핀 벳지 소품 삽을 발견했다. 누가 봐도 이건 경이 꺼. 이건 누가 봐도 내 거. 각자 취향의 핀 벳지 하나와 같은 데이지 꽃 모양 핀 벳지를 골랐다. 데이지 꽃 핀 벳지는 '내가 바로 꽃이에요' 하는 디자인으로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반 친구 모두가 '이건 꽃이야' 하고 그린 그런 대표적인 꽃 느낌이었다.


지리산 일출 등산을 갈 때 배낭에 같이 달고 가기로 했다. 꼼꼼한 경이는 배낭에 데이지 꽃 핀 벳지는 물론 간식거리, 마실거리, 물티슈와 여행용 티슈, 덧바를 선크림까지 아주 보부상처럼 알차게 짐을 꾸려왔다. 그에 반해 나는 벳지도 까먹고 선크림도 얻어 쓰고 휴지도 빌려서 화장실을 잘 다녀왔다. 정상에 올라서서 천왕봉 팻말과 배낭가방을 모아 두고 같이 사진을 찍어 기념으로 남기려 했는데 기념할 그 핀 벳지를 안 들고 가버렸다.


광안리 바다의 여유와 지리산의 정기를 따라 데이지과 꽃을 메인 꽃으로 선물했는데 경이는 모르고 있던 것 같았다. 한참 뒤에 그 꽃 모양 핀 벳지 기억나냐는 물음에 아! 하면서 또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또 꽃다발이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하며 사진을 남겼다.


전날 혼자서 걷는 황리단길은 온전한 자유시간이었다면 경이와 함께 걷는 황리단길은 살아있는 시간이었다. 같은 또래 여자애들끼리 사소하면서 그저 웃기 바쁜 무의미한 시간 보내기도 하고 어디 말 못 한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꺼내 서로 나누며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언젠가 경이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늘 너랑 같이 이렇게 놀아서 너무너무 즐거워서 행복하다고. 경이는 내 말에 길을 걷다 멈춰서 "헐. 그런 말을 남자 친구한테 들어야 하는데" 심각하게 이야기했다. 그건 맞는 말이지. 경이의 말에 동감했다.


사실 경주에 여행을 가서 한 거라곤 그저 걷고, 카페를 가고, 장 봐다가 숙소에서 음식 해 먹는 게 다였다. 특별한 기념품을 남기지도 않았고 여행이라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마치 여기가 내가 사는 동네처럼 경주에 잠시 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여행같이 보내야 한다고 하는데 경주에서 나는 여행을 일상같이 보냈다. 아니 경주라서 였는지. 옆에 있던 사람이 경이라서 였는지. 행복하게 해 주려고 준비한 꽃다발에 내가 행복해서 그랬는지. 여행에서 일상의 여유를 찾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던 순간들이었는데 익숙하다는 핑계로 잊고 있었나 보다. 잠깐의 경주의 일상이 끝났다. 다시 익숙한 서울 일상이 시작됐지만 더 이상 별 볼 일 없는 하루는 없다는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