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5일 차

집에서 열다섯 개의 물건이 사라지다

by muum


오늘 정리될 사물 세 가지입니다.

플라스틱 접이식 칼, 투명한 재질의 칼집 , 그리고 채칼 보호막이 선택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플라스틱 접이식 칼의 이야기부터 들어 봅니다.


“난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2014년 11월 12일이었어. 대만의 잡화점에서 당신들을 처음 만났지. 과일이 담긴 봉지를 들고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지. 그때 알았지. 내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택되었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으로 과일을 깎는 순간, 난 너무 행복했어. 물론, 내가 당신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이 칼 생각보다 잘 안 드네. 새 칼인데 왜 이러지? 일단 깎이기만 하면 됐지. 당신들 사이에서 그런 대화가 오갔어. 물론, 수치스럽긴 했지. 그래도 꿋꿋하게 열대 과일을 5개나 깎아냈어. 그게 내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 될 줄은 몰랐어.

며칠 뒤에, 커다란 가방에 한동안 갇혀 있었어. 내가 아주 멀리 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도착해 보니, 당신들이 사는 집이었어. 너무 기뻤어. 나도 이제 보금자리가 생겼구나. 이제 나도 새로운 삶을 살겠구나. 그렇게 잔뜩 기대했었지.

주변에는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었어. 그리고, 한참 뒤에야 알았지. 이 집에는 나보다 더 좋은 칼이 많다는 걸. 한눈에 보기에도 나보다는 멋졌어. 더 날카롭고, 더 세련돼 보였어. 그 칼들은 나처럼 허리를 접지도 않았어. 항상 허리를 꽃꽂이 편채로 있었어. 그때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 저렇게 좋은 칼들이 있는데, 나는 왜 데려온 걸까? 그런 의문도 들기 시작했지. 어쩌면 나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닐까? 직감은 맞았어.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 집에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물건이 됐지.

정말 오랜만이었어. 나를 다시 찾은 건. 반가웠어. 서랍에서 나를 꺼내면서, 당신의 아내가 그러더군. 이 칼이 아직도 있었네? 당신이 돼 물었지. 그 칼 버리려고? 그 순간 아! 아직 희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당신의 아내가 결정타를 날리더군. 이 칼 쓸 일이 없잖아. 오랫동안 나는 잊고 있었어. 나보다 멋진 칼들이 많이 있다는 걸 말이야.

이제는 나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 내가 일회용이었다는 걸. 당신들은 과일 깎는 칼이 잠시 필요했었던 거야.

그래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줘. 한때는 당신들에게 내가 가장 절실했던 존재였다는 걸. 과일을 깎던 순간만큼은 나도, 나도 빛나는 칼이었다는 것을 말이야.”


이어서 투명한 재질의 칼집이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당신들이 그동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나 없이, 나를 빼놓고, 칼을 오랫동안 방치해 뒀다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 내가 없으면, 손을 베거나 다칠지도 모른단 말이야. 그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알아?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칼집이 없는 채로 칼을 쓸 수 있는 거지? 조심성 없는 사람들 같으니라고. 나를 이렇게 홀대하면 안 된단 말이야. 좀 더 소중히 다뤄야 한단 말이야.

내 말, 충분히 알아 들었지? 그럼 어서 나한테 칼을 꽂아 줘. 처음부터 나하고 같이 있던 그 칼 말이야.

뭐? 칼이 없어? 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몰라? 이런 정신없는 인간들을 봤나. 잠깐만. 잠깐만. 그럼 나는 왜 지금까지 남아 있던 거야? 뭐? 있는지도 몰랐다고? 가만있어봐. 칼이 사라졌다는 건 이제 나도 필요 없다는 거 아냐?

잠깐만. 잠깐만. 내 말 좀 더 들어봐. 다른 칼이 나한테 혹시 맞을지도 모르잖아. 나 보기보다 넉넉한 칼집이라고. 더군다나 나는 이렇게 투명하잖아. 칼집 말고 다른 용도로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채칼 보호막이 마지막으로 입을 엽니다.


“거참. 무지 시끄러운 녀석들이네. 자기의 칼이 없어진지도 모른 채 살아 놓고서, 무슨 낯짝이 있다고. 그만 투덜대고 내 사연이나 한 번 들어 봐.

나하고 채칼은 사랑하는 사이였어. 우리는 언제나 함께 붙어있었지. 이 집에 오기 전부터 그랬어. 여기 처음 왔을 때, 환경이 달라서 적응하느라 힘들기는 했지. 그래도 우리의 사랑은 변함없었어. 아무도 우리 사랑을 방해할 수 없었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기긴 했어. 채칼이 조금씩 바빠지기 시작했거든. 하지만 일을 마치고 나면 언제나 내 곁으로 돌아오곤 했지. 날마다 무용담을 나한테 들려주곤 했어. 내가 오늘은 무를 잘게 썰었어. 이제 당근 써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은 커다란 양배추 하나를 전부 썰었더니 좀 피곤하네. 날마다 채칼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어. 채칼은 능력이 인정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더욱더 바빠지기 시작했지.

그런데 어느 날, 채칼이 돌아오지 않는 거야. 지금까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말이야. 내일이면 돌아오겠지. 내일이면 다시 돌아올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어.

기적이 일어났어. 절실했던 내 소원이 마침내 이뤄진 거야. 주방의 싱크대 서랍이 열리더니,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던 채칼이 나타난 거야. 이게 이 채칼에 끼우는 거였구나. 누군가 그렇게 말했어. 우리는 다시 합쳐졌지. 감격스러운 밤이었어. 둘이서 껴안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무용담도 밤새도록 나눴지. 그런데 좀 이상했어. 채칼이 예전 같지 않았거든. 과거의 자신만만했던 모습이 아니었어. 많이 위축되어 보였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럴까. 나는 채칼을 다독였지. 그런데, 채칼이 놀라운 말을 했어. 자기는 줄곧 주방 선반에 걸려 있기만 했다는 거야. 하는 일도 없이 말이야.

며칠 후, 채칼은 또 내 품을 떠났어. 채칼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

나를 이제 채칼이 있는 곳으로 보내 줘. 어차피 나에게 채칼 없이 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




파란색 플라스틱 접이식 칼은 저희가 대만에 여행 갔을 때, 구입했던 칼입니다. 급하게 과일을 깎느라 필요했습니다. 가장 저렴한 칼을 샀다는 이야기는 결국 하지 못했습니다.

투명 재질의 칼집에게 딱 맞는 칼은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릅니다.

채칼은 훨씬 전에 버려졌습니다. 제 손의 살점을 도려내던 날, 홧김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이 채칼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채칼이 어떻게 버려졌는지, 채칼 보호막에게는 끝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두 열다섯 가지 물건이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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