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정리, 6일 차

지금까지 열여덟 개의 물건이 사라지다

by muum
DSC03132.jpg


오늘 정리될 사물 세 가지입니다.

갤럭시 S2 목업 폰, 잉크가 다 된 무인 양품 0.38mm 펜, 그리고 육각렌치가 선택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갤럭시 S2 목업 폰의 이야기부터 들어 봅니다.


“나도 알아. 내가 태어날 때부터 가짜였다는 걸. 나는 진짜 하고 크기도 같고, 모양도 같고, 색도 비슷하지만 실제로 작동되지는 않지. 간혹 눈썰미가 나쁜 사람들은 종종 나를 진짜로 착각하기도 했어. 그럴 때는 나도 기분이 꽤 근사했다고.

아! 물론 알고 있어. 당신이 나를 왜 샀는지는 말이야. 진짜를 살 돈은 없는데, 진짜 같은 게 필요했던 거잖아. 당신이 왜 그럴듯한 가짜가 필요했는지는 나도 궁금하지 않아. 뭐? 그건 아니었다고? 진짜를 살 능력은 있었는데, 굳이 진짜가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그게 그거 아냐?

그러고 보니, 나도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할 때가 됐군. 나를 이렇게 꺼내놓은 것을 보니 이제는 필요가 없어졌나 봐? 뭐 하긴, 그럴 때도 됐지. 나하고 똑같은 진짜 폰이 나온 게 벌써 6년 전이니까. 진짜 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이제 얼마 없는 것 같긴 해.

그런데 기분이 좀 묘하긴 해. 진짜 스마트폰이 점점 줄어드니까 나도 쓸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말이야. 진짜가 많아야 가짜도 대접받는 이 현실이 슬프다고.”


또다시 등장한 무인 양품 0.38mm 펜이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 제 동료가 먼저 떠나갈 때, 저도 어느 정도는 짐작은 했어요. 나도 얼마 안 남았겠구나. 곧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죠. 남아있는 동료들 중에서 제가 잉크가 가장 적었거든요. 그 날 이후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솔직히 깜짝 놀라긴 했어요.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생각보다 제 잉크가 꽤 많이 남아 있었거든요. 며칠 만에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필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했어요. 그 순간만큼은 당신이 필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어요. 맞아요. 당신은 미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도대체 무슨 글을 쓰는 건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죠. 몰래 당신의 메모를 훔쳐볼 수밖에 없었어요.


늙는다는 것은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더는 무엇도 새롭지 않고, 낯선 도전이나 경험을 거부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익숙해지는 것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나의 반경을 축소하여 그 좁은 틀 안에서만 세상을 사는 것. 그리고 나를 넓히고 넓혀 세상 어디에 가든 낯섦이 껄끄럽거나 아프지 않게 되는 것. 그래서 그 낯섦을 순리로 보고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는 것.


목수정 씨가 쓴 <아무도 잠들지 않는 밤>을 읽다가 당신이 적은 글이에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이런 글을 옮겨 적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말이에요. 당신은 지금 어떻게 늙어가고 있나요?”


육각렌치가 말합니다.


“이번이 두 번째지. 아마. 나를 버렸다가 다시 데려온 적이 한 번 있었으니까. 어쨌든 용기는 가상하군. 뭐, 또 버린다고 해도 큰 걱정은 안 해. 잠시 후면 다시 데려올 테니까.

나는 당신이 나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거든. 처음으로 나를 버릴 때, 당신이 그랬잖아.

이건 언젠가는 쓸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혼잣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고.

그런 당신이 어떻게 나를 버리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나를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 놓기만 하면 돼. 그러면, 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줄게. 어때?”




갤럭시 S2 목업 폰은 진짜 같은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무인 양품 0.38mm 펜은 이번 버려진 것까지 합치면, 두 개째입니다. 저는 어떻게 늙어가고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육각렌치는 또 버려졌습니다. 이번에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이번에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모두 열여덟 가지 물건이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사물 정리, 5일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