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지는 화장용 붓의 마지막 고백을 듣다
“저의 본래 쓰임새는 화장용이에요. 파우더 화장을 하는 사람들이 제 붓끝에 화장품을 바른 다음에 얼굴에 바르죠. 그런데, 이 집에 들어와서는 단 한 번도 화장용 붓으로 사용된 적이 없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의아했죠. 왜 나를 쓰지 않는 거지?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건가? 나한테 어디 문제가 있는 건가? 혹시 내가 사은품으로 딸려와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그렇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세월만 계속 흘러갔죠. 저는 제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점점 확신하게 됐죠.
어느 날이었어요. 갑자기 저를 불러내더라고요. 이 집에 온 지 거의 반년이 다 지나서였죠. 아! 나를 잊은 건 아니었구나. 내가 아무 쓸모없는 존재는 아니었구나. 어쩌면, 나를 무척 아꼈던 건지도 모른다. 아끼고 아꼈다가, 이제야 나를 불러내는가 보구나. 가슴이 정말 두근두근거렸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불려 나가자마자 한 일은, 꿈에 그리던 화장이 아니었거든요.
글쎄 말이에요. 기가 막히게도, 저를 갖고서 먼지를 털더라고요. 프라모델에 쌓여 있는 먼지, 키보드에 쌓여 있는 먼지, 전자부품에 쌓여 있는 먼지를 터는데 저를 쓰더라고요. 내 참 기가 막혀서. 화장품 바르라고 만든 붓으로 먼지를 턴다는 게 말이나 돼요? 제 털이 어떤 털인데. 정말 너무 억울하고 분했어요. 이러려고 내가 붓이 된 게 아닌데.
그다음에도, 또 다음에도 저는 계속 먼지떨이 붓으로 쓰였어요. 그런데 불려 나가면 나갈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더라고요. 몇 번 더 불려 나가서 먼지를 털다 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아무것도 안 하고 처박혀 있는 것보다, 차라리 먼지라도 터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라도 이쁨을 받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미리 역할이 정해져 있는 붓 같은 건 없다. 쓰임새에 따라서 역할이 정해질 뿐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후회는 없어요. 꿈에 그리던 화장품을 단 한 번도 묻혀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에요. 제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아마 잊지 못할 거예요. 처음으로 먼지를 털던 그 날의 감동을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