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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귤 Apr 29. 2022

엄마의 콩국수

어렸을 때부터 온갖 국수를 좋아했다. 냉면, 잔치국수, 칼국수, 짜장면, 우동, 파스타 (라는 단어는 사실 어렸을 때는 몰랐고 그냥 스파게티만 알았다) 등등 하여간에 길고 가느다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음식은 거의 뭐든 맛있었다.


한편 앞선 문장을 '다 맛있었다' 라고 만들어주지 못하는 예외적인 케이스가 있었으니 문제의 그 국수는 바로 콩을 갈아서 만든 콩국수였다. 엄마는 콩국수를 참 좋아하셨는데, 어린애에게는 역시 좀 허들이 있는 음식인지 어렸을 때의 나는 콩국수만은 영 제대로 먹지 못했다. 면은 그렇다치고 그 특유의 콩물에서 느껴지는 콩 냄새가 약간 힘들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음식에 대해서는 퍽 엄격했던 편이라 편식은 절대 봐주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런 콩국수를 억지로 먹으라고 하지는 않으셨던 기억이니 아마 부모님도 콩국수는 어린이에게 난이도 있는 과제라는 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엄마가 워낙 콩국수를 좋아하셔서 접하기는 자주 접했지만 시도해 볼때마다 나는 장렬하게 후퇴하곤 했다.


그러던 내가 언제부터 콩국수를 먹게 되었을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지금은 오히려 콩국수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되었다. 외국에 나가서 살던 중에도 콩국수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무가당 두유를 사다가 적당한 대체품을 만들어 먹을 지경이었다. 지금도 오로지 콩국수만을 먹기 위해서 시청까지 나가 나사의 기술을 차용한 맷돌로 콩물을 낸다는 유명한 식당의 콩국수를 먹고 오기도 한다. 작년 여름에는 외식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차마 식당에서 먹지는 못하고 콩물과 면을 포장해 오기도 했다.


추정에는 아마 대학생 아니면 사회 초년생 정도 됐을 때였을 것 같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천천히 형성되어 왔던 입맛이 그 시기에 와장창 확장됐으니까. 아마 눈살을 찌푸리면서 콩국수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데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한 입 먹어보고, 어머, 이거 괜찮네, 하면서 계속 먹고, 그러다가 결국 사랑에 빠졌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정말 콩국수에 좋은 기억이 없나?


사실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기억은 있다. 좋은가, 나쁜가. 그건 엄마를 따라서 엄마의 동창 모임에 따라갔을 때의 기억이다. 나른하고 지루한 기억이다.


엄마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하신다. (심지어 지금 코로나로 잠시 중단되어 있을 뿐 최근까지도 그 모임은 계속되고 있었다.) 한 달 중 어느 때의 토요일 오후, 장소는 대체로 광화문이나 시청이었다. 당시 우리집은 광화문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한강을 넘어서도 한참 가야 하는 곳에 있었는데, 초등학생이던 내게는 정말 머나먼 여행 같은 길이었다. 그리고 그 46번 좌석버스에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방출해 온 땀과 담배 연기와 (버스 안에서 흡연이 가능했던 기대의 일이다) 체취가 가득 배어 오랫동안 거기 앉아 흔들리다 보면 멀미가 나곤 했다. 엄마가 당시 광화문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광화문, 시청, 을지로, 남대문 같은 시내의 지명은 우리에게 익숙했지만, 멀미를 비롯한 여러 이유로 그 근방까지 나가는 길에 엄마와 동행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한 번 그 길에 엄마와 동행했던 것이다. 동생들이 아빠나 할머니와 어디 갈 일이 있어서 나와 함께 있을 어른이 없었는지,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어쩌다가 나 혼자 엄마를 따라갔던 것만은 확실하다. 엄마가 시내에 나가야 하는데 나도 같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생들 없이 엄마를 독차지한다는 기분에 들떴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건 엄마를 독차지한 데이트와는 거리가 꽤 먼 시내 나들이였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신세계 백화점 근처 어딘가의 골목을 꼬불꼬불 지나 80년대에도 이미 낡은 느낌의 건물에 자리잡고 있던 식당으로 들어갔다. 여름이었고 꽤 더웠다. 겨우 건물로 들어가 식당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엄마의 친구 아줌마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아마 콩국수가 유명한 집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지금 신나게 다니는 진주회관에 그 때 갔던 건지도 모른다. 1962년에 영업을 시작한 집이라니 말이 영 안되는 소리는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도 콩국수를 시키고 내 앞으로도 한 그릇을 따로 주문해 주셨다. 여기 콩국수는 진짜 맛있으니까 한 번 먹어 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른 취급을 해 주신 것도 같지만 한편으로는 엄마도 그 때는 엄마 몫의 한 그릇을 다 드시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유명 가게의 콩국수도 어린이에게는 무리였다. 그전에 시도했던 콩국수보다는 맛있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나지만, 그래도 역시 한 그릇을 다 비우지는 못했다. 좌식 식탁이 기대진 한쪽 벽에 어깨를 대고 앉아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다가 창문 밖으로 전봇대와 지저분한 건물 옆면이 늘어선 풍경을 보기를 반복하면서, 아, 재미없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하고 생각했었다. 어른들 모임에 어색하게 끼어 있는 어린이의 자의식 때문에 나는 아직 이런 곳은 싫다고 티를 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분명 티가 나기는 했겠지. 그리고 엄마는 신경이 쓰이면서도 약간은 못본 척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나를 데리고 남대문 시장도 한 바퀴 둘러보고 원하는 간식거리를 사주는 보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나들이의 하이라이트는 그 부분이었을 텐데, 참 묘하게 내 기억에 지금까지 짙게 남아있는 장면은 식당의 오래 된 창틀과 그 너머로 보이던 회색 시멘트 빌딩과 전봇대의 풍경이다.


그리고 좋아하게 되기까지는 다시 십몇 년을 기다려야 했던 콩국물의 맛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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