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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Dec 17. 2023

너 뭐 돼?

뭐라도 되는지 묻지 못해 쓰는 글


 모처럼 가위에 눌렸습니다. 과수면이 연속되는 날들이면 꿈꾸느라 지쳐 깊이 잘 수 없습니다. 설거지를 미루고, 미룬 설거지를 시작할 때 큰소리로 내뱉는 욕을 참을 수가 없어집니다. 그런 나를 참기가 가장 힘들어서, 뭐라도 좀 피하고자 잠을 잡니다.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태껏 살아온 시간과 경험에 기대어 짐작할 뿐입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깨어 있는 순간에도 솔직한 사람인 나의 꿈속은 혼란 그 자체입니다. 죄책감에 시달리면 현실처럼 생생한 꿈이 고해성사로 나타나고, 분노는 타버린 냄비에 엉겨 붙은 기름때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습니다. 그래도 말이지요, 기본적으로는 체력이 좋고 잠도 잘 자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가위에 눌리는 일은 1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이벤트입니다.

 본인이 내뱉는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의 말을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내가 오해하는 건가? 하마터면 익숙한 자아비판과 자기 검열에 바로 빠져들 뻔했네.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 순간 그의 말을 끊지 못한 망설임이겠죠. 예의 바르게 끝까지 그 사람의 ‘생산적인 비판과 피드백’에 귀를 기울인 점. 그것이 내 잘못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김숙 언니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 상처 주네?’라고, 말하지 못했던 걸 인제 와서 후회하는 것이 나라는 사람인데요. 그런 일이 두어 번 반복되었고, 때마침 컨디션이 나빠졌고, 겨울이 다가오며 술을 자꾸 마시고 싶어 지고(그렇지만 별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무언가를 참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려 이윽고 가위에 눌리는 일까지 벌어진 겁니다.


 조금만 버티면 그 사람과 다시 만나지 않아도 돼서, 무엇보다 그 사람이 내 눈치를 보며 과하게 나에게 잘해주어서, 뭐가 되었든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거겠죠. 말하는 사람은 별 의도가 없었고, 나쁜 뜻은 더더욱 없었는데, 내가 괜히 과하게 받아들이는 일 말이에요. 무엇보다 사람을 미워하는 일에는 무지막지한 에너지가 쓰이니까 관두는 편이 좋잖아요. 좀 더 나아가 따져보면, 징그럽도록 조목조목 따져보며 그의 잘못을 찾는 내가 끔찍한 사람이 되어버리니, 아무래도 잘 지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잘 지냈습니다. 재미없는 농담에 대꾸를 해주고, 의미 없는 칭찬을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여전히 잘 지내고 쭉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불쾌감의 원인을 제법 또렷하게 깨달아 버린 시점에 자신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제 사람들 앞에서 호언장담한 대로 필요한 순간이 오면 나도 그에게 ‘생산적인 비판과 피드백’을 ‘너를 위해’ 해줄 수도 있겠죠. 써야 할 글을 미뤄두고 이런 걸 쓰고 있는데 못할 일도 없다 싶어요.

 그가 제시하는 비판적인 피드백이 제사 음식에 입 떼는 어르신들이 하는 말과 하나 다를 바 없다고 표현하자 깔끔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내가 느낀 과도한 울분의 반응이 명절 때와 다르지 않더군요. 상차림에 나의 정성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 차려놓은 상에 밤 몇 알 깎아 올리고, 가운데에서 절하는 걸로 제사상 전체를 평가하는 남자 어른을 향한 염증 어린 화증이 그를 향해 부글부글 솟아올랐습니다. 삿대질을 하고 싶어 지더군요.

“너, 뭐라도 돼?”


 그가 나와 잘 지내기 위해 한 행동들에 대한 불쾌함의 원인도 뚜렷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유유서를 따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원체 윗사람처럼 굴기를 좋아하는 그의 눈높이에 맞춰볼까요? 아주 시건방지더군요.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숫제 나를 여동생 대하듯 어르고 달래려 들었습니다. 칭찬이 듣기 싫었던 이유는 말속에 영혼이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외모 칭찬은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어요. 여자 사람들은 외모 칭찬하면 무조건 좋아하거라 여기는 단순 무식한 사고방식이 답답합니다. 칭찬도 칭찬 나름입니다. 본인이 굉장히 무례했다는 것 정도는 깨달았으면 좋겠네요.


 몰라서 그랬겠지요. 내뱉기 전에 생각을 좀 더 해야 했다는 것을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은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실은 나도 쉽게 계단에 올라서서 말하는 사람이라 그 사람에게서 나의 단점을 찾은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예의 없게 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싫은 티는 좀 냈지만요.


 ‘안 볼 사람한테는 좋은 말만 한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한테는 쓴소리 한다.’라고 그랬던가요?

그 말이 얼마나 오만하고 거만한지 모르는 모양인데, 잘 생각해 보고 앞으로 인간관계에서도 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쓴소리’는 꼰대들이 쓰는 언어입니다. ‘내가 너 잘되라고 사랑의 매를 든다.’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너, 뭐라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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