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놀이

올겨울 왜 눈이 안 오나. 정말 안 내릴 거니?

by 원효서

자정이 가까워지면 로스토프 남매는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방문한 저택에서 휘청휘청 걸어 나와서 썰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별빛 아래에서 울려 퍼지고, 그들의 걸음은 그들이 얼마 전에 왔던 반듯한 길을 넓게 돌면서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가는 모양을 눈 위에 남겼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이면 집주인들은 눈 위에 그들의 발자국이 만들어놓은 커다란 높은 음자리표를 발견하곤 했다.
<모스크바의 신사 중에서>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 속에서 찾아낸 겨울 장면에는 눈이 가득했다. 로스토프 남매의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눈놀이에 견줄 만한 경험은 없지만, 나의 겨울 놀이에도 눈과 얼음은 충분했다.
어릴 때 살던 마을은 한겨울에 내린 눈이 오래도록 녹지 않는 산골이었다. 원래도 잘 다니지 않는 버스나 트럭이 아예 움직이지 못할 만큼 눈이 오면 어린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어른들이 마당과 골목에서 눈을 치우면 아직 깨지지 않은 연탄을 찾아 굴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포슬한 눈들이 흙먼지와 함께 붙어 회색빛이 도는 눈뭉치가 만들어지면 서둘러 눈사람을 만들었다. 당근이나 모자 장식은 없었지만 나뭇가지를 주워 눈코입과 팔은 꼭 만들어주었다. 늘 만나는 세 집의 남매들이 모여서 놀았는데 눈싸움을 한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들 참 온순한 아이들이었다 싶다.
눈이 조금이라도 쌓이면 아이들은 비료포대로 눈썰매를 탔다. 얼음을 지치는 썰매(우리 동네에선 그걸 스케이트라고 불렀다)는 만들기가 어려워 큰오빠들이 있는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빌려 타야 했지만 눈썰매는 달랐다. 비료포대는 어디에나 있었고 속을 채울 지푸라기도 지천에 널려 있었다. 우리는 동네 구석구석을 몰려다니며 조금이라도 비탈진 곳이 있으면 썰매길로 만들어버렸다. 집 앞을 빙판으로 반질반질 닦아 놓아서 부모님이나 어른들에게 혼이 나면 눈둑 밭둑을 옮겨 다니며 놀았다. 돌이나 나무에 긁히고 옷과 신발이 다 축축해져도 하루 종일 비료포대를 펄럭이며 뛰어다녔다. 날이 풀려 눈이 녹기 시작하면 어서 다음 눈이 내리기를 기다리던 겨울 방학들.

어른이 되어서도 눈이 쌓인 사과밭 가는 길에서 몇 번 비료포대를 타 본 적이 있다. 재미는 있지만 소리를 지르려니 동네 부끄럽고 꾹 참고 타자니 그것도 우습고, 엉덩이는 어찌나 시리고 배기는지, 심한 경사길도 아닌데 무섭기는 또 왜 그리 무서운지. 몇 번 타고는 멋쩍은 기분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제는 예술혼을 발휘해 꼬마 눈사람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눈놀이다. 장독대에서 하얗고 깨끗한 눈들을 모아 코팅장갑을 끼고 야무지게 뭉친다. 나뭇가지로 팔을 만들고 얼어버린 배춧잎과 무청시래기로 머리카락을 만들고 작은 화분으로 모자를 씌워준다. 노끈으로 리본을 묶고 방울토마토로 귀여운 입도 만들어준다. 좋은 자리에 눈사람을 올려두고 사진을 찍어주는 걸로 눈놀이는 끝이 난다.

네 살 딸을 위해 플라스틱 눈썰매와 눈 오리 만들기 장난감을 사놓아야겠다. 눈이 오면 아이와 눈을 맞아야지. 하루 종일 함박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덧 하나

이 글을 쓰고 한 달이 지나 아이와 눈썰매장에 다녀왔다. 아이가 눈 오리에는 심드렁했지만 눈썰매는 또! 한 번 더! 를 맘껏 외치며 탔던 날, 행복했다.


덧 둘

글을 쓴 지 50일쯤 지나 드디어 어제 아침에 눈이 내렸다. 눈은 스치듯 내리다가 금세 비가 되어버렸지만, 반가웠던 첫눈.



#미루글방

#겨울글방


2010년에 만든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