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 길에 만나는 엄마들이 짙은 밤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 여름내 밝은 갈색 머리가 산뜻했던 어린이집 원장님도 고동색으로 염색을 했다. 유치원 버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겉옷은 대부분 무채색의 긴 점퍼. 이제 진짜 겨울이 왔다.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춥고 색채가 부족한 계절이다. 날씨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들도 차갑고 울적한 분위기다. 을씨년스럽다. 휑하다. 스산하다. 옹송그리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주렁주렁 열린 사과, 노랗게 반짝이는 벼들로 가득했던 시골의 들판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어 어디를 돌아봐도 서글프다며, 엄마는 산골의 겨울을 슬퍼했다. 시골집에 가서 동네를 둘러보면 어디 눈을 둘 곳 없는 빈집 같은 풍경에 나도 울적해지곤 했다.
도시의 겨울도 마찬가지였다. 난방을 마음껏 할 수 없는 낡은 주택은 겨우내 추웠다. 전기장판을 뜨끈하게 데우고 극세사 이불을 덮어도 코끝이 시렸다. 앉아 있는 동안에는 쉬지 않고 뜨거운 보리차를 마셔서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려야 했다. 욕실이 얼마나 추운지, 샤워라도 하려면 용기를 내야 했다. 씻고 나오면 또 추우니까 보리차를 마셔야 하는 악순환.
오랫동안 나에게 겨울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추위와 곰팡이였다. 아무리 환기를 자주 하고 매일 닦아내도 벽마다 곰팡이가 난리였다. 햇빛이 잘 드는 2층 집으로 이사하는 소원을 이루었건만 해가 잘 들어도 결로는 막을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벽이 완전히 새카만 곰팡이로 뒤덮였던 겨울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고 싶다.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던 1월에 동생과 나는 온 집의 창문을 열고 몇 날 며칠 동안 페인트를 칠했다. 얼룩덜룩한 벽지는 연두색으로, 삐그덕 대는 낡은 문짝은 연분홍색으로 칠했다. 남은 페인트로는 오래된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칠했다. 지금도 시골집에는 그때 색칠한 연노란색 액자가 걸려있다. 페인트를 칠한 후에는 다행히 곰팡이와 이별할 수 있었다.
겨울의 단점은 많았다. 껴입은 옷 때문에 몸이 무겁고 껴입어도 추우니까 옹송그려 다니다 보니 어깨가 아팠다. 거추장스럽지만 빠뜨릴 수도 없는 목도리와 장갑도 짐스러운데 털부츠를 신고 빙판이라도 걸을 때면 긴장을 하고 뒤뚱뒤뚱... 기름보일러의 비싼 난방비, 저녁도 먹기 전에 어두컴컴한 하늘, 춥고 눅눅해서 빨래가 안 마르는 집. 겨울이라 좋은 점은 음식물쓰레기 냄새가 나지 않는 것뿐이라고 자주 말했었다.
그렇다고 겨울의 모든 순간이 나쁠 수는 없었다. 힘겹게 이불에서 나와 대문 밖을 나서서 입김을 내뿜으며 걷는 것은 상쾌했다. 하늘이 내려앉을 듯 뿌옇게 흐린 날에는 시장 귀퉁이에 있던 외할머니 집에서 나던 그리운 냄새가 났고, 새파란 하늘에 새털구름이 펼쳐진 날에는 찬 공기가 산뜻했다. 심호흡을 하면 양치질한 듯 코와 입이 화해지고 바람이 불어오면 얼굴이 간질간질, 가슴속이 시원해졌다.
버스에 앉아 탁한 초록과 뿌연 갈색이 반복되는 산에서 드물게 보이는 자작나무의 흰색을 찾는 순간이 좋았다. 새하얀 몸통과 섬세하게 뻗은 뽀얀 잔가지들이 칙칙한 풍경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무성한 잎을 떨군 숲은 속이 들여다보일 듯 듬성듬성하면서도 황토색과 회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두워지는 낮은 산 등성이에 나란히 서 있는 나무들의 실루엣을 보면 이름 모를 산들을 다 알 듯한 마음이 들었다. 찬바람에 부서진 낙엽이 뒹구는 겨울밤 거리를 이어폰을 꽂고 한참씩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전히 나는 여름을 가장 좋아하고, 가을이 깊어지면 단풍잎이 떨어질까 조바심이 난다. 얇은 잠옷만 걸쳐도 춥지 않은 집에서 해가 가득 드는 창밖을 보면서도 ‘이 겨울을 또 어떻게 보내나, 꽃도 잎도 져버린 쓸쓸한 풍경을 한참이나 지켜봐야 하는구나.’ 하며 서글퍼한다. 그래도 겨울은 나에게 왕참나무 이파리와 파란 하늘을 매일 보여준다. 새빨갛게 물드는 남천 열매와 산수유도 많이 열려 있다. 담 구석에서 자라나는 초록 풀과 보랏빛으로 물드는 자리공 덩굴도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색이 없는 풍경이라 슬퍼하다가 그만 머쓱해진다.
새빨간 남천 열매
#미루글방
#겨울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