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를 즐겨하지 않는다. 다 싫은 집안일 중에서도 특히 별로인 것이 요리하기이다. 요리를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머릿속에는 맛있는 음식보다 수고로운 재료 준비, 실망스러운 맛, 수북한 설거지거리가 먼저 떠오른다. 거기다 의욕을 뚝뚝 떨어뜨리는 심술궂은 심사위원이 요리를 평가하기까지... 아무렇게나 먹어도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면 빵과 커피 같은 것만 먹고살고 싶다. 아침에는 올리브, 치즈가 들어있는 치아바타와 커피를 먹고 점심에는 햄버거와 샐러드, 저녁에는 초콜릿 케이크와 와인을 먹으며 살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목한 그릇, 찌개가 눌어붙은 냄비, 식기 건조대 틈에 빠지는 젓가락 같은 것 없이 접시와 컵, 포크만 씻으면 되는데. 그러나 입이 빵을 좋아해도 브런치 먹은 날 저녁에는 본능적으로 김칫국을 끓여 먹게 된다.
겨울철에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갱죽의 빨간 김치 국물이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갱죽’은 시래기 따위의 채소류를 넣고 멀겋게 끓인 죽이고, ‘밥국’이 식은 밥에 김치를 넣어 간단히 끓인 국이라고 한다. 우리 집에서는 김칫국에 식은 밥, 수제비, 콩나물을 넣어서 끓인 죽을 갱죽이라고 했다. 할머니와 엄마가 자주 끓여 주었기 때문에 된장찌개처럼 모든 집에서 다 먹는 음식인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될 때까지 한 번도 안 먹어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골집에 가서 엄마가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갱죽’이라고 했다. 엄마는 고깃국이나 갈비찜이 아닌 겨우 그런 게 먹고 싶으냐고 했다. 어릴 때부터 고기를 잘 못 먹여서 고기 맛도 모른다며 나를 가엾어했지만 그 얼큰하고 뜨끈한 맛이 좋은 걸 어떡해. 엄마가 그놈의 갱죽!!이라고 할 때까지 갱죽을 찾았다.
손이 큰 엄마는 항상 큰 냄비에 갱죽을 끓였다. 어릴 때 엄마가 갱죽을 끓일 때면 나와 동생들이 옆에서 수제비를 뜯어서 넣곤 했다. 맑은 콩나물 김칫국에 수제비(때로는 가래떡)와 밥을 넣으면 국물이 점점 끈적해지면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갱죽이 완성될 때쯤이면 커다란 곰국 솥을 휘젓기 힘들 정도로 밥알과 수제비가 엉겨 붙었다. 국그릇 가득 김이 풀풀 나는 갱죽을 담아 후후 불어가며 한 그릇을 얼른 먹고 아직도 따뜻한 죽을 한 번 더 떠다 먹으면 배가 따끈따끈했다. 이불속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뒹굴다가 야식 생각이 나면 또 죽을 떠먹으러 갔다. 국물 없이 뻑뻑하게 덩어리 진 수제비와 밥알이 바닥에 눌어붙은 것을 박박 긁어먹으면 그게 더 맛있었다. 배불리 실컷 먹고 나면 입이 좀 짠 것이 갱죽의 단점인데, 그럴 때는 감주를 한 사발 먹으면 최고였다.
간식을 구하기 힘든 산촌이라(슈퍼에 가려면 8km를 가야 한다) 과일이 없는 겨울에는 달콤한 것이 참 없었다. 가을부터 만든 몇 개 없는 곶감은 일찌감치 쏙쏙 빼먹어버렸다. 방구석에 있는 항아리에는 땡감을 소금물에 담가 삭히고 있었는데, 다 익으려면 한참이 걸렸다. 괜히 담요를 풀고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았다고 혼이 났다. 꺼내 본 감은 아직도 떫기만 하고... 그래서 할머니가 감주를 끓인다고 하면 하루 꼬박 걸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침을 삼켰다. 한밤중이라도 감주가 다 되었다고 하면 꼭 맛을 보고 자곤 했다. 내일 아침에 한 그릇 가득 먹을 수 있는 감주를 떠올리며 기쁜 마음으로 잠이 들곤 했다.
우리만큼 엄마도 감주를 굉장히 좋아해서 대구에 살 때도 감주를 자주 먹은 편이었다. 나는 맑은 국물만큼 밥알도 좋아해서 국물을 마신 다음에 숟가락으로 밥알을 푹푹 떠먹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감주를 먹을 때는 밥숟가락을 챙기는데 맑은 국물만 먹는다는 사람들을 보면 의아하다. 왜 그 맛난 밥알을 먹지 않지?
요즘은 시골에 가도 갱죽을 잘 먹지 않는다. 면사무소 근처에 칼국수집과 돈가스집이 생겼고 마늘치킨이 맛있는 엄마 친구의 가게,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도 있다. 우리도 이제 하루 종일 밥을 하는 수고를 다 알고, 아빠도 외식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혈당을 관리해야 하는 엄마는 감주를 잘 만들지 않는다. 슈퍼는 여전히 멀리 있지만 우리가 운전을 할 수 있으니 마트에 파는 주스와 식혜를 사다 먹을 수 있다.
설날 오후에 집에 가면 남은 전과 튀김을 넣은 잡탕찌개 대신 갱죽을 끓여 먹자고 해야겠다. 이번 설에는 엄마가 감주를 만들면 좋겠다. 뜨끈한 죽을 먹고 개운하게 감주 한 그릇, 맛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