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일 - 최종의 최종 4

헤어진 남친이 보낸 메일을 안 읽을 수 있나

by 원효서




잠이 오지 않았다. 선배가 잠든 침대를 등지고 컴퓨터 책상에 앉아 디시인사이드 코스프레 갤러리(2002년이었다)를 구경했다. 코스프레의 퀄리티는 천차만별이라 비웃다가 감탄하기를 반복했다. 알림음을 꺼둔 휴대폰에는 연우의 문자가 계속 들어왔다. 너도 아까 울고 있었잖아. 내가 분명히 봤어. 헤어지고 싶은 게 아니잖아. 너는 나를 사랑하잖아. 사랑해. 사랑해. 제발........... 새벽 2시, 메일을 보냈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내가 연우와 사귀는 1년 반 동안 우리 둘만 보는 '일방통행'이라는 이름의 게시판에 쓴 글은 적어도 50개가 넘었다. 길고 짧은 러브레터들은 답장을 기다리지 않았다. 연우가 읽어준다는 것만으로 감격했다. 나는 내 사랑에 푹 빠져서 안달복달하며 마음을 끓였고, 말재주가 없고 글쓰기를 싫어하는 연우에게 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지만, 일단 그렇게 내뱉고 나니 지고지순하고 절절한 순애보가 가슴에서 샘솟았다. 네가 내 마음을 몰라주어도 괜찮아, 내가 사랑하니까,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이 정도야.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에게 푹 취해버린 스무 살, 너는 나의 첫 남자, 우린 정말 운명적인 연인이야. 다른 여자애들처럼 남자애랑 밀당하지 않는 나는 정말 특별하고 쿨한 여자친구이지 않니?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고, 그걸 너에게 숨기고 싶지 않아. 나는 너를 당기고 당기고 또 끌어당길거야. 니가 스타킹 페티시가 있다고? 좋아! 나는 다리가 예쁘고 커피색 스타킹이 잘 어울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너에게 해줄게! 그러니까 답장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입대 직전 연우가 게시판에 하나하나 댓글을 달아주었을 때, 나는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똑같은 크기로 맞닿았다고 느꼈다. 몇 년 동안 글씨를 쓰지 않은 듯한 필체로 분홍 편지지에 사랑을 담은 편지를 써주었을 때, 나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내 사랑을 알아주었어!! 연우와 나는 영원히 사랑할 거야!!


그러나 훈련소에 들어가서 수신자 부담으로 첫 전화가 걸려왔을 때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바라는 찌질한 연우의 목소리에 그만 역정이 나고 말았다. 엄마가 듣고 있으니 안 된다는 내 대답에 왜 편지에도 사랑한다고 쓰지 않느냐고 묻는 말, 징징대는 말들은 질리기에 충분했다. 연우야, 내가 좋아하던 너는 적어도 쿨했잖아. 그렇게 아쉬운 거 없이 굴더니 결국 군대에 가자마자 나한테 매달리는 거니? 너 원래 그런 애였니? 정말 별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편지쓰기를 그만두었다. 웬만해선 전화도 잘 받지 않았다. 그때 선배가 나에게 훅 다가온 거였다.


아, 참! 메일을 열어봐야 했다. 말줄임표가 수억 개 쓰인 문자였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나의 이별 선언으로 인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돌변해 버린 나를 이해할 수 없고 포기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이제 더 이상 읽지 말고 메일을 지우라는 구절과 세로로 길게 찍힌 마침표들. 이걸 읽지 않고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재빨리 마우스 스크롤을 내렸다. 도르륵도르륵.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랑 섹스할 때마다 도저히 흥분이 되지 않아서 포르노에 나오는 여자들을 떠올려야 했어.”

한 구석에서 나를 괴롭히던 미안한 마음이 싸늘하게 식고 익숙한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다. 분노. 모욕을 받고 느끼는 정당한 분노. 이제 나는 연우를 미워하고 욕할 권리를 얻었다.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연우는 울고 있었다.

“메일 읽었어?”

“응.”

“미안해. 포기하려고….”

“끊어.”


거 참, 어이가 없군. 살다살다 별 개소리를 다 듣는구나. 그냥 남자친구가 새로 생겼다고 말할 걸 그랬나? 진짜 기분이 더럽네.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해달라고 미친놈처럼 졸라서 해줬더니 나를 그냥 구멍 취급해? 아 진짜 좆같네. 안 헤어졌으면 어쩔 뻔했냐? 그런데...내가 그렇게 안 섹시한가? 선배는 내가 섹시해서 좋다고 했는데. 연우는 변태니까 그랬겠지. 내가 부족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가만 보자, 내가 섹스를 잘 하는 것 같진 않아. 이것 참 질 떨어지고 답 없는 지옥이네. 평생 기억하긴 하겠다. 그게 연우의 목적이라면.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