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와의 시시한 만남은 이어지고
연우의 사과 문자는 그후에도 몇 번 더 왔다. 이틀 후 저녁 무렵에는 모르는 번호로 끈질기게 전화가 걸려 와서 받았더니 연우의 군대 선임이었다. 휴가 복귀가 늦어서 나에게 연락했다고,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선임은 한 시간 후에는 연우가 무사히 복귀했다고 알려왔다. 초등학교 때 위문 편지를 주고 받은 군인 아저씨가 떠오르는 부드럽고 예의바른 목소리였다. 나는 서둘러 연우를 과거에 묻고 싶었다. 어서 묻어버리고 봉분도 비석도 없는 주인 모를 무덤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길 바랐다. 당연히 연우는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고 이제 메일의 마지막 문장으로 남았다. 좋은 추억과 미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선배와 착실하게 만났다. 연우의 망발로 인해 선배의 망언은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되었다. 나와 자면서 내 몸 대신 포르노를 떠올리는 남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나와 자고 싶어 안달하던 선배가 나쁘지 않아보였다. 내 몸이 섹시하다고, 내가 귀엽다고 꾸준히 말했기 때문에 선배를 점점 좋아하게 되었다. 선배는 일본 애니메이션만 보던 나에게 헐리우드 영화들을 소개해주었다. 스타워즈, 분노의 질주, 반지의 제왕, 스파이더맨을 즐기게 되었다. 선배의 최애 배우가 니콜 키드먼인 덕에 그녀가 나오는 영화(버스데이걸부터 도그빌까지)를 몽땅 챙겨보았다. 그때 본 디아워스가 내 인생 영화가 되기도 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선배와의 데이트는 언제나 영화와 외식, 드라이브로 이어졌다. 선배의 집이 비면 좁은 침대에서 섹스했다. 지극히 평면적이고 수동적이며 따분한 섹스, 섹스는 별로였지만 다정했다. 같이 자고 나면 선배는 더욱 다정했다. 나를 위해 밥을 차려주고 포근하게 대해주었다. 그런 점이 좋았다. 내가 한 번도 친하게 지낸 적 없는 곱게 자란 것처럼 보이는 남자아이라는 점이.
그러나 선배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생성되는 이미지는 반듯하고 깔끔한 상체가 아닌 녹두색 트레이닝 바지와 칠부 면바지이다. 윽 소리가 절로 나오는 내가 본 어떤 옷보다도 싫었던 그 바지들. 선배는 머릿결이 찰랑찰랑했고 피부가 뽀얀 남자였다. 결코 인물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고 운동부족 샌님 스타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팔다리가 가늘고 배가 좀(아니 제법) 나왔다. 겨우내 교복처럼 입던 녹두색 트레이닝 바지는 톡톡한 솜바지였다. 매일 차를 타고 다니면서 왜 그리 따뜻한 바지를 챙겨입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편안한 애착바지인 모양이었다. 겨울에는 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여서 "그따위 바지를 입지 말아달라"라는 요청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바보같았다. 둥그렇게 나온 배의 3분의 2쯤 되는 아래쪽에 밴딩이 걸쳐진 꼬락서니란. 그런 핏은 유치원생까지만 허용되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녹두색 솜바지를 입을 수 없는 봄이 되자 다행히 이상한 옷은 더 이상 없었다. 아무 특징 없는 베이지색 면바지나 청바지는 무난했다. 다시 한번 문제를 느낀 건 한여름, 선배의 집에서 만나서 놀다가 저녁에 사람들과 술 약속이 있어 나갈 준비를 하는 참이었다. 옷장에서 얄궂은 칠부바지가 등장했다. 닭다리처럼 하얀 종아리 선까지 내려오는 그 바지는 둥글게 휜 선배의 다리 라인을 돋보이게 했다. 본래도 길지 않은 다리 길이를 더 짧아보이게 하는 그 바지, 요즘 입는 버뮤다팬츠처럼 귀여운 디자인도 아니었다. 엄마 말을 잘 듣는 초등 남학생이 영어 학원에 갈 때나 입을 법한 몹시 편하고 시원한 재질의 칠부바지. 나는 선배에게 다른 바지가 없냐고 물었다. 눈치 없는 선배는 정말 시원하고 편한 바지라며, 그대로 나갈 기세였다. 나도 옷을 썩 잘 입는 멋쟁이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선배에 비하면 정말 괜찮은 편이었다. 어리고 늘씬한 여자였으니까. 그런데 저런 바지를 입고 같이 나가다니? 내가 여러 차례 다른 바지로 갈아입으라고 말했지만, 청바지는 덥고 다른 반바지는 작아서 불편하다고 했다. 이런 젠장!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바지 입고 나가면 죽여버릴 거야!”
민망한 침묵이 흐르고 선배는 바지를 갈아입었다.
선배는 내가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같은 치마를 입으면 잔소리를 했다. 아빠도 하지 않는 ‘남자들이 너를 어떻게 보느니 어쩌느니’하는 헛소리를 듣고 있을 수 없어서 그 따위 말이 얼마나 틀려 먹었는지 와다다 쏘아붙이면 ‘이래서 똑똑한 여자랑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랬는데’하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헛소리를 했다. 그러면서 본인은 남자니까 편한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도 된다고 여기며 살아간다. 옷차림 지적은커녕, 아이고 우리 이쁜 아들 소리만 듣고 자라온 촌스러운 남자들은 개판인 옷장 때문에 여자 친구에게 욕을 먹는 일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