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일 - 최종의 최종 6

너는 나를 왜 만나니?

by 원효서


선배를 이야기하려면 번거롭지만 '그 무리'를 설명해야겠다. 연우와 헤어질 때 선배와 내가 묵었던 서울 자취방을 가진 선배의 동기 병희 선배. 병희 선배는 나를 여동생처럼 대했고 나도 그를 친오빠처럼 대했다. 병희가 추천하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병희와 선배, 그리고 잠깐 사귄 첫 남친이던 선배까지가 무리의 고정 멤버(아저씨같은 선배와 이상한 의대생이 가끔 끼었다)였다. 대학 시절 나는 이 좁은 찌질이 무리에서 두 명의 남자 친구를 사귀고, 가족애와 이성애를 오락가락 오가는 병희의 관심을 받았다.


병희와 선배는 애증의 친구 관계였다. 둘은 서로를 비웃고 갈구면서 지냈는데, 말로만 우정을 쌓는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그들의 감정선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 병희는 선배의 얄팍한 취향을 깔보았고, 항상 깔끔하고 단정한 선배는 병희의 생활 전반에 깔린 너저분함을 경멸했다. 선배가 제일 싫어한 병희와 나의 공통점은 ‘쓸데없이 문학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언어 생활이었다. 나에게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개뿔도 없으면서 책 좀 읽었답시고 감성적인 표현을 한다는 점이 선배의 비위를 거슬렀다. MBTI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면 F와 T의 차이라고 웃고 넘겼으려나? 병희에게 대놓고 말은 못하면서 나에게만 티를 냈는데, 병희와 내가 잘 통하는 듯 보일 때 질투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머리가 자주 떡지고 얼굴에 끼인 기름을 티셔츠로 닦아대는 병희에게 나는 손을 댈 마음이 하나도 없었는데, 자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 섬띵 스페셜한 감성을 공유하는 게 싫겠지. 질투는 곧 사랑,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나는 선배를 이해해주었다. 잔디밭에서 소주를 마시고 취한 병희가 공각기동대 사운드트랙을 부르면서(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니기에 더 우스꽝스럽다) 내 가슴을 빤히 보는 걸 모르냐고 선배가 말했을 때, 나는 모른척했다. 그 정도 시선과 놀림은 기분이 나쁘지도 않다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몰랐던 척했다. 기꺼운 시선은 아니었지만, 풍만한 가슴은 술기운이 올라오면 내 자신감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멋있잖아. 포르노도 아니고 공각기동대에 비교해주면 말이야.


학교 축제 준비가 한창이던 초여름 저녁 교정을 거닐다가 내가 말했다.

"이런 어설픈 화려함이 아름다운 것 같아요."

선배는 버럭 화를 냈다.

"꼭 병희처럼 말하네."


무리 안에서 어떤 공격을 받아도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병희의 성희롱이 선배의 ‘몇 명과 잤느냐?’라는 질문보다 더 나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병희는 늘 술에 취했고, 아마도 나에게 손을 대고 싶었겠지만, 결국 한 번도 내 몸에 손을 대지 못(안)했다. 그러나 선배는 달랐다. 선배는 내 남자친구가 되고 싶다고, 나를 좋아한다고 맨정신으로 말했고, 역시 맨정신으로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욕했고, 여전히 맨정신으로 졸라서 내 허락을 받아냈다.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선배를 사귀기로 결정했고, 극도로 낮게 책정한 내 자존심과 존엄은 더 이상 깎여나갈 부분이 별로 없었다. 쿨을 가장한 무심함으로 너그러웠다. 단 한 가지, 내 말, 내 느낌과 감상에 시비를 거는 짓만은 참을 수 없었다. 화가 났다. 내 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선배는 이어서 구시렁댔다. 병희 같은 말투는 참기 힘들다고, 자기가 병희를 어떻게 느끼는지 너무 모른다고.


선배는 친구가 없어서 자기를 찾아주는 병희와 어울려 놀지. 꼴도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니까 같이 놀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병희는 우스꽝스럽고 때때로 똑똑해서 만나면 실컷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나를 그만큼 웃겨줄 수 있었나? 단 한 번이라도? 나는 대꾸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선배는 나의 무엇을 좋아한다는 말인가? 본인 곁에 있는 어리고 만만한 여자애이기 때문인가? 내가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까탈스럽지 않게 곁에 있어주기 때문인가? 나에게서 병희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귀는 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겠지? 혼란을 피하려 들수록 짜증이 밀려들었다. 익숙하고 삐딱한 방식으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극단적인 표현으로 상대를 질리게 만들어서 두 번 다시 같은 대화를 반복하지 않기. 감히 내 느낌에 토를 다는 짓을 하지 않도록.

“선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말할 때 항상 진심이거든요. 목숨을 걸고.”

선배는 납득하지 못한 듯 헛웃음을 웃었다. 뭐 언제는 내 말을 알아들었던가? 알아들을 의지도 없었겠지. 싱거운 사과를 받았다. 선배를 만날수록 병희 무리와는 멀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선배와 헤어진 후 다시 병희 무리에 돌아갔을 때, 선배와 연락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