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일 - 최종의 최종 10

부원장과 상준

by 원효서


원장이 소개해 준 남자는 수학 학원 부원장이라고 했다. 퇴근 후 카페에서 만나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내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그는 짙은 눈썹을 많이 움직이며 말했는데 쌍꺼풀 있는 눈과 찡긋거리는 콧잔등이 병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병희는 나에게 고백 공격을 하고 1년쯤 후에 결혼을 발표했다. 병희의 아내가 될 사람은 병희가 귀엽다고 나와 지나 앞에서 애정을 과시했고, 착한 여후배 역할에 내키지 않던 우리가 줄담배를 피우자 인상을 찌푸리며 화장실에 갔다. 역시나 술에 취한 병희는 “내가 능력이 있었다면 너희 같은 애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트림 소리보다 못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병희의 결혼식을 구경하고픈 호기심을 불쾌감이 압도했기에 지나와 나는 커플 잠옷 세트 선물로 병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



부원장이라는 남자는 말이 많았다. 내가 만나 본 강사들은 대부분 말이 많았고(나도 그렇지만), 원장들은 호흡보다 많은 단어를 뱉었다. 정적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나는 재미없는 그의 이야기에 열심히 호응했다. 나는 서른 살, 부원장은 서른세 살이었다. 큰언니뻘인 우리 원장과 큰 형님뻘인 그의 원장이 만남을 주선했다. 일찌감치 결혼해 인생 선배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렇듯 우리의 연애와 결혼까지 상상하며 즐거워했고, 우리는 대충 장단을 맞추러 나온 자리라 미소로 서로를 응대하는 중이었다. 종일 말하고 퇴근한 밤이라 배가 몹시 고팠지만, 밥집은 문을 닫았고 술집에 가기에도 어색한 사이. 때늦은 커피를 홀짝이며 일어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을 대할 때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겠지. 부원장이 안 해도 될 말을 줄줄 쏟아냈다. 대학 때부터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취업 준비를 한답시고 자취방에서 거지꼴로 생활하는 동안 다른 남자가 생겨 떠났다고 했다. 여보세요, 저한테 왜 사연을 푸시는 거예요.라고 속으로만 말하면서 끄덕였다. 아이고, 저런. 여자 친구의 배신을 알았을 때는 치를 떨며 욕했지만, 폐인이 되어 칩거하던 어느 날 거울을 보니 여자 친구가 떠날 만도 하다 싶었단다. CC일 때는 동아리 회장까지 하며 활발한 인기인이었던 남자 친구가 취업 실패를 반복하며 늘어나는 거라곤 살뿐이었으니 스스로 보아도 한심했다고. 숱 많은 곱슬머리가 엉망으로 길어버린 자기 모습이 올드보이의 오대수 같았는데, 100kg이 넘도록 늘어버린 체중 때문에 오대수보다 더 나빴다고 했다. 다행히 그의 과거사는 나락으로 치닫지 않고 다이어트 성공기로 이어졌다. 그는 여자 친구를 깨끗이 잊고 운동에 전념해 날씬해졌다. 친하게 지내던 형님이 차린 학원에서 열심히 일해서 부원장이 되었다.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괜찮은 사연이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적합한 화제는 아니었지만, 남자 친구가 있으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화제의 적절성을 따질 처지는 아니었다.


과할지언정 솔직한 부원장 앞에서 잔잔한 죄책감을 느꼈다. “사실은 나에게 몇 년이나 사귄 남자 친구가 있는데, 결혼 약속은커녕 데이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요. 친구들 결혼하는 걸 지켜보면서 심란해 죽겠는데, 걔가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요? 여자친구는 선 시장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나. 직업도 변변찮고 집안이 쫄딱 망한 본인은 선 자리가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여자인 넌 다르지 않겠느냐고 말하더라고요. 선을 한 번 보는 경험도 나쁘지 않을 거라나? 원장님이 성화를 부려서 나온 것도 있지만, 실은 남자 친구에게 화가 나서 나왔답니다.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요. 미안해요. 그래도 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서 용기를 내 말씀드립니다.”

나는 튀어나오는 말을 밀어 넣고 입술만 달싹이며 부원장의 말에 대꾸했다. 학부모와 학생에 대한 불만까지 주고받은 후 그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술은 좀 하시나요? 오늘은 너무 늦었고 다음에 소주 한 잔 마셔요. 이야기하다 보니 꼭 함께 술을 마셔보고 싶네요.”


대답 대신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택시 안에서 혹시나 운명의 상대를 만나지 않을까 하며 품었던 헛된 망상, 상준을 향한 미움과 미안함, 부원장에 대한 실망과 안도 따위가 차례대로 밀려왔다. 상준과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또 곱씹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조용한 우리 사이, 상준이 나를 의심할 일은 없었다. 내 모든 신경은 몇 년째 지치지 않고 상준을 향해 뻗어있었으니까. 어떤 모욕과 개무시를 당해도 곁에 남아 있었으니까,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소개팅과 선자리에 매주 나가도 모를 것이었다. 한 시간 전에 잘 자라는 문자를 주고받았지만, 상준에게 전화해 소개팅을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안은 채 잠들었다가, 다음날 아침 부원장의 다정한 문자에 ‘좋은 하루 보내세요 ^^’로 답장하고 번호를 삭제했다. 한결같이 상준이 보고 싶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