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만났다고 이야기가 길지는 않아
상준과 나의 연애는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5년이 넘도록 연애를 이어가는 내내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헤어질 결심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미련이고 집착이고 사랑이고 중독이었다. 6년인지 7년인지 만나고 헤어지는 날조차 완전한 끝이라고 받아 들이지 못했다. 상준이 나를 찾아와 사죄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용서하고 가난한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영원히 함께할 거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상준이 나에게 함께 하자고 말한다면, 사랑의 힘으로 내가 가진 모든 자원을 우리를 위해 쓸 작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대로 끝이었다. 헤어지는 장면을 복기하고 또 복기하고, 술자리에서 판소리 사설처럼 떠들고, 카페에서 친구에게 조목조목 읊는 일을 반복하는 동안 상준은 나를 찾지 않았다. 상준이 나를 떠난 건 분명했다. 홧김에 소개팅에 나갔던 일, 허송세월하게 한 책임으로 돈을 내놓으라는 말까지 해버린 내가 그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일까?
오래 사귄 만큼 여러 번 극적인 다툼과 화해가 있었지만 마지막 이별이야말로 우리 연애의 찌질함을 모두 합친 결정판이었다. 나는 늦은 밤 퇴근 후 동네 언니네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상준은 오후부터 오랜만에 만난 술고래 친구와 자취방에서 술을 마신다고 했다. 친구가 갔다기에 치킨집으로 오라고 답장했더니 "헤어지자"라는 카톡이 왔다.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여기는 헬" "지옥"이라는 메시지가 연달아왔고, 헛소리의 수준이 심상치 않아 상준의 집을 찾아갔다. 상준은 만취 상태였지만 또렷하게 이별을 말했다. 진심이라고, 정말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결혼한다면 우리는 '공멸'할 거라고 했다. 멸공도 아니고 공멸이라니, 이런 단어를 말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 있다니 우스웠다. 한바탕 말싸움 같지 않은 다툼을 하고 상준은 먼저 잠이 들었다. 나도 졸음이 밀려와 눈을 붙였다. 잠결에 상준은 나를 껴안고 가슴을 주물렀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말해놓고도 이럴 수가 있나? 이런 인간인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찬바닥에서 옷을 덮고 잤다.
다음날 오전에 눈을 떴을 때, 나는 지난밤 상준이 필름이 끊겼기를 바랐다. 술이 센 상준이 단 한 번도 완전히 블랙아웃된 걸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랬을 거라 믿고 싶었다. 나와 헤어지고 싶을 리가 없어. 쟤한테는 나밖에 없잖아. 그러나 상준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너저분하고 퀴퀴한 자취방에 햇살이 쨍하니 들어왔다. 나와 상준은 역겨운 숙취로 골머리를 앓으면서 답 없는 이별 장면을 이어갔다.
"네가 원하는 결혼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살 건데? 여기 원룸에서? 너랑 결혼한다고 상상하면 여기서 지지고복고 살 모습이 보여. 끔찍해. 유모차를 끌고 좁아빠진 계단을 낑낑거리면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고. 그렇게 살 수 있어?"
"우리 집에 살면 되잖아. 방도 2개 있고."
"너희 집?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왜 말이 안 된다는 걸까? 집이 다 망해도 번듯한 아파트에 부모님과 동생이 사는 상준에게, 오래된 주택 2층에 있는 2천만 원짜리 전세방은 집도 아니라는 걸까? 그에게 우리의 가난은 같이 겪고 이겨낼 문제가 아니었다. 굶어 죽을 것 같으니 각자 제 살 길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였다. 연애 초기에는 당장 결혼해서 돈을 모으고 어쩌고, 나중에는 학원을 차려서 성공하고 어쩌고 하던 소리들 모두 의욕 없는 공상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입이 썼다.
제대로 일도 안 하면서(일자리가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돈이 없다고 질질 짜는 꼴도 하루이틀이지. 그러니까 사실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원장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말은 영원히 숨길 걸 그랬지? 너의 알량한 자존심에 도저히 그 학원에서 일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야. 나만 그만뒀더라면 너는 여전히 그 학원에서 제법 돈벌이했을 테고, 돈 없이 시간만 남아돌아 니가 내 곁에 붙어있지 않았을 테고, 각자 바빠서 이미 벌써 헤어졌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나 때문에 너까지 학원에서 나오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니?
나는 열심히 상준을 붙잡았다. 내가 공부방 차리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내가 돈을 많이 벌 수도 있는 일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곧 내 친구 결혼식인데 니가 이럴 수 있느냐 원망도 했고, 만난 세월이 얼마인데 공멸 따위 단어를 말할 수 있느냐고도 했다. 상준의 무지개반사에 지쳐갈 무렵 내가 물었다. 그래도 내가 좋지 않냐고, 내가 그립지 않겠느냐고.
상준은 대답했다. "너무 좋아하지만, 네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은 아니야."
상준이 원해서 억지로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담배를 달라고 하자 상준이 한 번 거절했다. "야, 이제 와서 니가 뭔 상관이야?" 하자 담뱃갑째로 넘겨주었다. 곰팡내 나는 한 뼘짜리 주방 창문에 붙어서 피우는 담배는 반갑고 향긋했다. 아름다운 이별 따위 없겠지만, 이렇게 흉하게 입냄새를 풍기고 개기름 흐르는 얼굴로, 떡진 머리카락을 겨우 묶은 꼴로 헤어지는 거야? 끝까지 구질구질하네. 어쩌면 이게 우리 본모습인가 봐.
상준은 와중에 해장을 하고 가라고 나를 붙잡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배달시킨 콩나물황탯국을 반 정도 먹고 일어났다. 상준이 늘 불만인 '밥상 한 번 안 치우는 짓'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일어났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상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인생 어떻게 살 지 잘 고민해 봐."
나는 밤마다 뒤척이며 상준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고 그 남자의 연락을 기다리던 다음 해 가을밤에 상준이 2번 전화를 걸었고, 나는 받지 않았다. 완전히 끝이었다.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던 그 긴 연애는 오래 만났다기보다는 아주 오래 걸려 헤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너무 사랑해서 헤어질 수 없었던 상준과의 이별에서 아직까지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 한 번 제대로 된 꼴로 멀쩡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데이트 후에 예의를 갖추어 헤어짐을 완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 헛된 아쉬움이다. 집이나 집 앞에서 만나는 데이트만 하는 사이, 청유형 문장은 내 입에서만 나오는 사이, 눈치를 보며 식사나 영화를 권해도 거절이 더 흔했던 사이에 품위 있는 이별을 바라다니, 나도 참 욕심이 과했다.
헤어지고도 몇 년이 흐른 어느 순간 일상에 불쑥불쑥 끼어드는 상준의 모습에 소스라칠 때 깨달았다. 기억 속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준이 그때마다 나에게 '헤어지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내가 울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상준은 그만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회피형 인간인 그는 내 입에서 "더는 못해먹겠다, 헤어지자."라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천지를 모르고 '나의 위대한 사랑은 이따위 시련에 굴하지 않지.' 상대가 원치 않는 주문을 염불처럼 외며 상준의 곁을 지키는 일이 의리이고 사랑이라고 믿는 내가 그의 말대로 짐이었음을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미안하다고 말할 걸 그랬다. 눈치 없이 들러붙어서 정말로 미안했다. 헤어지는 일은 영영 사과조차 전하지 못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