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란 이런 것이었지
솔로가 되었다. 외로움에 몸서리칠 나를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걱정이 무색할 만큼 무덤덤한 솔로가 되었다. 휴학을 하고 낮에는 공부방에서 아르바이트하고 밤에는 컴퓨터 앞에서 놀았다. 연애가 빠진 자리에 잊고 지내던 일본 록밴드가 돌아와 덕질에도 다시 불이 붙어 팬픽에 푹 빠졌다.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와 퀴어 애즈 포크를 외울 때까지 반복해서 봤다. 술친구인 병희 무리와도 다시 만났다. 병희 무리에 새로운 사람이 있을 때마다 나의 친한 친구 한둘이 같이 놀기도 했는데, 반드시 내 친구에게 치근대는 남자가 있어서 꾸준히 놀 수가 없었다. 눈뜨고 봐줄 수 없는 그들의 주접은 즐기고 싶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아무런 썸도 호감도 없이 농담과 술잔만 오가던 어느 날의 술자리에서 병희가 돌림노래처럼 내 칭찬을 시작했다. 원피스 안에 입은 티셔츠(또 가슴이나 쳐다봤겠지)가 귀엽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All The Things She Said – t.A.T.u)가 특별하다, 평소보다 길어지는 타령을 막아야겠다 싶은 타이밍에 병희 친구 하나가 재차 “진심이냐?”라고 물었다. 병희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나에게 “병희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무얼 어떻게 할지 알 수 없었고, 궁금하지 않았지만 병희는 잘하겠다고 했다. 무르익은 술자리의 열기 속에서 나는 병희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말았다. 만취한 병희는 내일이면 이불에서 뒹굴대며 기억조차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두어 달에 한 번 만나는 사이, 다음 만남에는 이 에피소드도 리셋이다. 술자리를 파하고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아 제정신인 지나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병희가 연락하면 어쩔 거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정오쯤 병희가 전화를 걸어왔다. 세상에, 진짜 진심이냐? 남자새끼들이란!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잔 지나가 어떻게 할 거냐고 재차 물었고, 나는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어제 내가 분명히 잘해보라고 말했지만, 병희가 전화를 거는 건 잘하는 짓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 찍힌 병희의 이름에 소름이 끼쳤다. 남자로 다가오려는 병희는 징그러웠다. 의남매로 지내기로 했던 새내기 시절부터 찌질이와의 짧은 연애, 연우와 선배와의 역사까지 쭉 지켜본 병희가 내 옆자리가 비었다는 이유로 들이대다니, 그 누구와도 친구 사이로 지낼 수 없단 말인가? 세 번째 울리는 전화를 끊자 병희는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았다. 계절이 바뀔 무렵 아무 일도 없던 듯 지나와 나와 병희 무리는 다시 술집에서 만났고, 병희의 주정에는 나를 향한 원망이 짧게 추가되었다.
“너도 되게 이쁘거나 인기 있는 것도 아니잖아. 왜 나는 안 되냐?”
“쯧, 싫다면 싫은 줄 알아요. 어차피 별로 진심도 아니면서.”
나와 헤어지고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은 선배에게서는 문자 한 통 없었고, 잊고 지내던 연우의 전역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연우가 메신저에서 함께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 안부를 물었다. 메신저에 접속할 때마다 연우 이야기를 듣다가 아이디 차단을 해제했다. 곧 연우의 메시지창이 보라색으로 떠올랐다. 연우는 채팅할 때마다 ‘너는 나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첫사랑이니까 잊기 힘든 것 같아, 너는 잘 지내니? 언제 한번 보고 싶어. 친구로 지내자. 시시한 대화들이 오갔다. 연우와의 채팅이 길어질수록 친구는커녕 지인으로 지내지도 못하게 매몰차기 짝이 없었던 나의 첫사랑을 자꾸 떠올리게 되었다. 한달음에 달려오기에는 너무 먼 곳에 사는 연우와의 연락은 안전하게 느껴졌고, 구남친이 나를 잊지 못한다는 사실에 속도 없이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날씨가 아주 좋았던 초가을날 연우가 나를 만나러 오고 싶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다. 연우는 그새 좀 늙어 보였다. 순한 눈매와 느슨한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밤송이 같은 군인 머리가 유난히 안 어울렸다. 전역 군인보다는 막 출소한 사람 같았다. 죄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연우가 내 눈치를 살피자 으쓱했다. 나에게 미련이 남은 것을 숨기지 않는 남자 앞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한 번도 한 적 없던 ‘어장 관리’가 이런 기분일까?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라 해도 크게 기우는 관심의 크기는 무기가 되었다. 나는 해맑게 잘 웃었고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고 노래방에 가서 미친 듯 일본 노래를 불러댔다.
그날 밤 메신저에서 연우는 당연한 수순으로 ‘다시 잘해보자’를 시전 했고, 나 역시 당연히 거절했다. 구남친이 다시 남사친이 될 필요가 없었고, 현남친이 될 이유도 없었다. 하도 애절하게 부탁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난 것뿐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안 된다고, 지난 일 가운데 내가 잊은 건 하나도 없다고. 연우는 천천히 사라졌다. 몇 번 더 매달리고 몇 번 더 거절당하면서 내 인생에서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헤어지는 일은 울지 않고 분명히 해두는 편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