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는 일 - 최종의 최종 8

남친의 전여친 이야기를 굳이 알고 있다

by 원효서


선배의 이별 이야기


선배에게는 나를 만나기 한참 전에 오래 사귄 애인이 있었다. ‘어떻게 선배가 이런 언니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미인이었다. (실제로 본 적은 없고 선배가 찾아서 보여준 미니홈피에서 사진을 몇 장 보았다) 선배가 노량진에서 수험생 생활을 할 때 애인은 누구나 이름을 아는 외국계 기업에 취직했다. 선배의 수험 생활이 길어지자, 회사에 적응한 애인의 연락이 뜸해졌고, 제대로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애인이 새 남자를 만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자신을 놓아주지도 않으면서 속이기까지 하는 애인을 내려놓고 싶어서,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애인이 아직 나의 연인이길 바라면서 집 앞에서 기다렸다. 혹시라도 놓칠까 봐 잠복 형사처럼 차에서 한순간도 내리지 않았다. 빈 페트병에 소변을 보면서 현관을 노려보는 자신에게 진저리를 쳤지만, 끝장을 보고 싶었다. 해가 지고 애인과 낯선 남자가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 길지는 않았던 지옥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자, 커플이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다. 선배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서 애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선배와 눈이 마주친 애인이 입 모양만 뻐끔거리며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딱 섹스하고 나올 정도의 시간이었다고.


그날 밤늦게 애인이었던 사람을 만나 들으나 마나 한 변명을 듣고, 하나 마나 한 인사를 나누고 선배는 혼자가 되었다. 전 애인은 팔짱을 끼고 걸어갔던 그 남자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났고, 내가 선배를 만나기 시작할 무렵 서울로 돌아왔다. 옛날 남자 친구에게 연락하는 찌질한 유부녀가 되어서. 미니홈피에서 사진을 보고 나자 나는 그 여자가 더욱 궁금했다. 궁금해도 딱히 알아낼 정보는 없었지만 몇 번 더 미니홈피를 들락거렸다.


선배와 헤어지기 전 몇 달 동안 고민했다. 나를 결혼 상대로 가정하고 읊어대는 공상을 반복해서 듣고, 가슴 아픈 가정사와 유년기의 상처까지 알고나니 새삼 무겁고 부담스러워진 관계. 대학 3학년, 선배와의 만남은 1년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헤어질 수 있을까? 동양철학을 공부해 사주를 봐준다는 청년에게 선배와의 궁합을 물었다. 말 그대로 고만고만, 그저 그런 부부가 될 거라고 했다. 선배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도 여러 번 상담했다. 그리고 어느 주말 중화비빔밥을 시켜 먹고 담배를 피우다가 “이제 선배가 좋지 않아요.” 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친구가 선배 소식을 전했다. 텅 빈 미니홈피 가운데 서 있는 기본 미니미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c를 되찾아야해!” 내 이니셜인가? 그렇다고하기에는 선배는 문자 한 통 없이 쿨한 전남친이 되어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말도,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는 문자도 없었다. 병희의 말에 따르면 이니셜의 주인공은 선배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만난 어느 여자라고 했다. 그 여자에게도 남자친구가 있다던데…. 하며 말끝을 흐리는 병희에게 자세히 더 묻지도 않았다. 그러거나말거나.




구남친들의 역사(?)를 떠올릴 때 선배는 비중이 가장 적은 사람이다. 다른 이들에 비해 좋은 점도 싫은 점도 웃음도 눈물도 고만고만하니 강렬하지 않은 사람. 그에게 나도 그 정도로 기억되면 그만이다 싶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찾아 보게 되고, 니콜 키드먼을 사랑하게 된 것도 선배에게서 시작한 취향이다. 선배와 본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의 주요장면에 나와 서로 즐거워했던 그의 아이디는 검색할 일이 없더라도 앞으로 오래 기억할 것이다.


병희 무리와 소식을 딱 끊은 선배가 어찌 지내는지 아는 사람도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와 함께 여름휴가를 떠날 만큼 친했던 지나가 칠성시장 거리에서 한 번 그를 보았다고 했다. 여전히 찰랑거리는 천연갈색머리를 휘날리며 곁을 지나갔다고, 아내처럼 보이는 평범한 여자가 곁에 무표정으로 걷고 있었다고.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