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과 끽연 사이
찬바람이 불면 입맛이 당긴다. 뜨끈한 우동 국물, 뜨거운 커피, 달콤한 핫초코, 향긋한 뱅쇼, 화사한 화이트 와인, 오동통하고 매끈한 굴, 달큰한 정종. 그리고 담배. 가을바람이 불면 담배 생각이 난다. 점점 간절해진다.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내서 톡톡 치고 라이터로 불을 붙이면 츠즈츠즈 소리, 입술에 닿는 보송한 필터 느낌, 빨아들이고 내뱉을 때 스르르 풀리는 긴장, 곡선을 그리며 위로 뻗어오르는 회보랏빛 연기. 써늘한 공기에 하~하고 입김이 나올 때 연기를 들이쉬고 내쉴 때의 개운한 맛.
심호흡한다. 어깨와 귀가 멀어지게, 좌골을 바닥에, 척추뼈를 곧게 세우고 정수리까지 한 선이 되도록 자세를 잡는다. 양 무릎은 뜨지 않게, 들이쉬고 내쉬고, 복부 당기고 괄약근에 힘주고 갈비뼈를 조인다. 들이쉬고 내쉬고, 아, 담배 피우고 싶다. 신성한 요가 수련 시간에 부적절한 욕망이다. 다시 정수리를 뽑아 올린다. 마치고 나가서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요가도 더 열심히 따라 할 텐데.
동네를 걸어 다닐 때면 아무 때나 담배 연기를 맡는다. 곁에 있는 친구는 눈살을 찌푸리고 두리번거린다. “아, 진짜 또 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네! 쯧!” 시선을 돌리면 아저씨 혹은 청년(때로 젊은 여성) 이 담배 연기를 푸푸 뿜고 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부러워한다. 카페와 술집에서 마음껏 흡연했던 20대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어리기도 했지만, 세상 눈치를 볼 일이 없었다. 소개팅하는 자리, 엄마·아빠 앞이 아니라면 마음껏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보다 훨씬 더 어른인 지금의 나는 왜 자유롭게 담배를 피울 수 없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나요? 제 딸이 8살이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안에서 금연이기 때문에 나가서 피워야 하는데, 동네 아저씨들과 쓰레기 분리수거장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용기가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여름이 엄마 담배 피운대. 소문이 나면 곤란하겠죠. 매번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일은 또 얼마나 번거로운가요? 집에서 과외하고 있는 처지에 담배를 뻑뻑 피우는 모습을 동네 주민들에게 들킨다면 아무래도 영업에 지장이 있겠지요? 그리고 지극히 당연한 이유인데 건강에 해롭지요. 최근에 유방에서 섬유선종을 제거했고 지난달에 이석증도 있었고 기관지와 소화기관이 어릴 때 같지 않은데, 건강을 더 챙기지는 못할망정 흡연이라니요. 얼마나 힘들게 끊었던가요? 그렇지만 마흔 넘도록 지난 연애나 복기하는 내가 담배를 그리워하지 않고 사는 법을 알 리가 있나요?”
담배를 배운 건 스무 살 여름, 선배들과 술을 마시던 날이었다. 다음날 친구에게 말했더니 자기는 이미 담배를 피운 지 한참 되었다며 담배 한 갑을 들고 강변으로 달려 나왔다.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을 줄 몰라 꿀꺽꿀꺽 삼키면서 몇 개비의 꽁초를 버렸다. 손에 배는 던힐 냄새가 좋았다. 향긋했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여름밤마다 맡던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담배 벌크 냄새였다. 할머니 손마디에서 나던 냄새와도 비슷했다. 돈이 없을 때는 88멘솔, 형편이 괜찮을 때는 말보로 멘솔이나 버지니아를 샀다. 울적한 일이 있으면 말보로 레드를 샀고 너무 독하다 싶으면 던힐을 샀다. 새로 나온 레종을 자주 샀고 디스플러스는 맛이 없어서 얻어 필 때만 피웠다. 담배가 좋았다. 한숨을 푹푹 내쉴 수 있어 좋았고, 그 때문인지 늘 이리저리 날뛰는 정신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은 차분해져서 좋았다. 술기운이 빨리 올라와서 좋았고, 커피가 더 맛있어져서 좋았고, 아무것도 못 할 때 할 수 있는 조치라서 좋았다.
10년 정도 흡연자로 지내다가 서른쯤부터 간헐적 흡연자가 되었다. 금연 기간이 몇 달씩 이어지다가 한 번씩 담배를 사면 한 갑을 다 피우고 다시 끊는 식이었다. 서른둘 가을에 결혼하고 싸움과 수동공격을 반복하던 첫겨울,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의 던힐 1밀리를 한 개비 두 개비씩 훔쳐냈다. 며칠 후부터는 담배를 샀다.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베란다에 놓인 낚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공단 끝에 자리한 원룸촌에서는 누구나 자기 집에서 담배를 피웠다. 창문을 열고 연기를 푸푸 뿜다 보면, 어느 나라의 말인지 알 수 없는 노래들이 자주 들려왔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기 위해 끼니를 때웠다. 하기 싫은 청소와 설거지를 미루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고, 집안일이 끝나고는 개운하게 또 한 개비, 그리고 샤워를 했다. 재방송으로 몇 번씩 본 드라마 <세 번 결혼한 여자>를 보며 또 담배를 꺼내물었다.
서른넷에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하면서 마침내 금연에 성공했다. 성공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제약 안에 완전히 들어왔다고 해야 할까.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편의점에 갈까, 남편 담배를 피울까, 쓰레기장 옆에는 사람이 늘 있으니까 길 건너 아파트 흡연장에 갈까, 정문 앞에 순대 트럭 기다리는 자리가 으슥하니 좋던데….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관뒀다. 번거로웠다. 이 기회에 끊는 거지. 담배가 그리워질 때마다 담배 피우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실컷 말만 했다. “담배 피우고 싶다!!” 세상 건전한 친구 중에는 다행인지 흡연 경력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 조신해 빠진 아기 엄마들 같으니라고. 얌전한 애 엄마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나도 금연을 이어갔다. 이문세의 노래 <옛사랑>처럼.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 내버려두듯이….’ 차 안에서 열창하며 그리움으로 간직했다.
금연할 이유는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이, 일, 건강, 돈, 남편 눈치.
‘건강’을 빼면 완전히 여성 흡연자로서의 애환이다. 세상 눈치 안 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때는 할머니다워지는 시기 정도? 좀 늙긴 했지만, 아직 할머니는 멀었는데…. 휴학생 시절 아르바이트하던 학원에서 초등 남자애 둘이 싸우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야! 담배는 아빠들만 피우는 거거든?”
“아니거든! 여자도 담배 피우거든!”
“누가!”
“우리 엄마는 똥 눌 때 꼭 담배 피운단 말이야! 선생님! 여자도 담배 피우죠?”
그래, 나도 피운단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짐짓 진지하게 대답했다. 어른은 누구라도 담배를 피울 수 있다고. 20년이 흘렀다. 여전히 담배 피우는 엄마는 음지에나 있다. 차를 타고 다른 동네 피시방까지 찾아가서 줄담배를 피운다는 친구의 후배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그 고생을 하며 흡연자가 될 순 없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피워도 될 이유는 하나.
다들 담배를 피운다고요. 드라마랑 영화에서 멋진 역할들은 모두 담배를 피운다고…. 지금은 동조자에서 산드라 오가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요. 아, 너는 멋진 역할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따라 하고 싶은데요! 안 멋져도 잘 피울 수 있거든요!
나의 그리운 담배 사랑이 타령으로 끝나지 않고 계획으로 이어지게 된 건 다 진 때문이다. 집으로 초대해서 버섯전골을 끓여주고 흡연할 수 있는 베란다에 담배와 재떨이를 차려두다니, 이토록 완벽하게 유혹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다니!! 9년 만에 담배를 피우면 구역질이 날 줄 알았더니 요즘 흡연 새내기들에게 유행이라는 그 담배는 필터에서 달콤한 향이 나고 연기가 부드러웠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듯(잘 못 탄다), 수영 기법을 잊지 않듯(수영 못 한다) 흡연은 자연스러웠다. 왜 이렇게 숨어서 피워야 하느냐는 신세 한탄이 무색할 만큼의 해피타임.
천천히 빨리 한 개비를 피우고 진이 내려주는 진한 커피를 마셨다. 집에 갈 시간이 임박했을 때 다시 한 대 더 불을 붙이며 짧은 시간을 음미했다. 오 마이 갓, 너무 좋잖아. 첫사랑을 떠올리듯, 여행지의 노을을 그리워하듯 만날 수 없어도 사랑할 수 있어.
중독 아닌 사랑이 있다고요? 그건 사랑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