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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일기 세 개

우산과 독감과 겨울바람

by 원효서


11월 27일 목요일

우산


아끼는 우산이 하나 있다. 20대일 때 토즈에서 2만 몇 천 원을 주고 산 까만 우산이다. 까만 바탕에 자잘한 하얀 별이 가득 새겨진, 견고한 장우산. 그 해 유난히 장마가 길었거나 비바람에 우산이 뒤집히거나 했을 게다. 집에 있는 아무 우산이나 쓰지 않고 인터넷을 뒤져서 우산을 산 걸 보면. 그 묵직하고 까만 장우산은 살대가 16개라 절대 뒤집어지지 않았다. 비 오는 날마다 그 우산만 들고나갔다. 비가 그치면 짐스러운 장우산이었어도 손목에 걸고 걷는 기분이 좋았다. 팡! 하는 소리를 내며 펴지고 빗물을 털어낼 때는 촘촘하고 촉촉한 방수섬유가 찰찰찰하는 게 좋았다. 어린아이처럼 지팡이처럼 탁탁 소리를 내며 바닥을 치며 걷을 때도 있었다.


우산은 결혼할 때에도 나와 함께 구미로 건너왔다. 무거워서 비 오는 날마다 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튼튼하다. 폭우가 내릴 때는 한 방울씩 정수리에 빗물이 떨어지만 쓸 만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찍찍이가 조금 약해졌지만 앞으로도 꽤 오래 들 수 있을 것 같다. 눈 내리는 날에고 들고나가야지.




11월 28일 금요일

독감


아마도 그때가 독감이었지 싶다. 영이네 집에서 종일 과자를 먹고 버스를 기다리던 겨울날, 한파가 몰아쳤다. 평소에도 잘 오지 않는 버스가 그날따라 유난히 늦게 왔다.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웠다. 좀 쉬면 낫겠지 싶었지만 밤새 토하고 열이 올랐다. 엄마는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일어나서 걸을 힘도 없었다. 목이 너무 아파 엉엉 울었다. 아기 때처럼 엄마 옆에 누워서 보채며 자다 깨다 했다. 사흘쯤 지나 살 만해져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진아. 이제 좀 씻어라. 냄새가 나. 하던 엄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떠오른다.


어리니 그렇게 견뎠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여름이가 독감 판정을 받았을 때 겁이 덜컥 났다. 40도까지 열이 올라도 해열제를 먹으면 금세 입맛이 도는 여름보다 혹시나 독감이 옮아 고생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아프면 누가 나를 돌봐준단 말인가. 택시를 불러 병원에 가고 알아서 수액을 맞고 약을 챙겨도 쉽게 낫지 않을 텐데. 아이가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멀리 앉아 있었다. 사흘 동안 마스크를 꼭 끼고 잤다. 다행히 아이는 금세 나았고 나는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12월 3일

겨울바람


매년 12월 초입이면 '이제 겨울 시작!'을 알리는 찬바람이 불어온다. 과연 12월이다, 연말 분위기, 그러고 보니 낙엽이 더 떨어졌다. 옆사람과 꼭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어깨를 움츠리고 발을 동동 굴러본다. 들어서는 카페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화려하다. 꼬치어묵과 우동, 칼국수가 저녁밥상에 자주 오른다. 전기장판과 폭닥한 이불 사이에 끼어 단잠을 자고, 아침이면 식탁 의자에 걸어둔 분홍깔깔이를 바로 걸쳐 입는다. 뜨거운 보리차를 끓여 식기 전에 다 마셔버린다. 나보다 체온이 살짝 높은 아이의 몸을 폭 감싸고 온기를 느낀다. 씻을 결심에서 옷 벗기 사이 시간이 무한정 늘어난다. 집에서 양말을 벗지 않는다.

목이 시리면 추위가 곱절이 되어 페이크목폴라를 샀는데 예상보다 불편해서 잘 쓰지 않는다. 아이의 방한용품을 사는 김에 밤색 바라클라바를 하나 샀다. 괜히 골지 촘촘한 요가레깅스도 샀다. 명백한 과소비이지만 멈출 수 없는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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