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 내 방, 내 자리

쓰면 쓸수록 각박한 심정

by 원효서


우리집 물건들은 대체로 제자리에 있다. 안쪽은 혼돈의 카오스라도 뚜껑을 닫으면 안 보이도록 만들어진 수납공간들이 반듯한 선과 면을 그어준다. 안경을 벗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외면하고 있지만 그럭저럭 깔끔한 집이다. 십 년째 내가 애지중지 관리하는 남편 집,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 집. 집에 내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 이게 내 자리가 아니었으면 싶을 때마다 강박적으로 정리정돈에 매달린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손바닥만 한 장난감 하나까지도 모두 제자리에 두는 일에 집착한다. 거실도 방도 주방도 욕실도 모조리 일터인 내 자리. 캐런 앤의 노래 ‘not going anywhere’를 흥얼거리며 공간을 다듬는다.


선 시장에 나설 때 엄마와 내가 가장 중요시한 조건은 “시가에서 집을 마련해줄 수 있는가?”였다. 나는 참한 인상을 풍기는 젊고 날씬한 여성이었기에 평범한 남자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었다. 풍족하지 못한 집안에서 자란 장녀인 점, 고용 안정을 기대할 수 없는 학원 강사라는 직업은 내 수준의 선 시장에서는 흠이 되지 않았다. 보수적인 동네에서 기대하는 여성은 모름지기 순종적인 며느리, 다정다감한 아내이자 어머니상. 나는 그럭저럭 그런 여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선을 본 남자가 듬직하고 착해 보여 바로 사귀었고, 생일과 화이트데이에 꽃과 선물을 사주었기 때문에 결혼 상대가 되었다.


집을 가지기 위해 포기한 건 자만추 로맨스의 낭만이었다. 사랑과 연애를 최우선 가치로 삼던 20대를 완전히 뒤로 하고 더는 가슴 떨리는 끌림 따위에 나를 맡기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을 했다. 정신적으로 통하는 일은 추상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매달리지 않겠다. 집과 자동차가 있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자리를 잡고야 말겠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성공, 자리 잡기니까. 결혼을 반대하는 동생에게 말했다.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 대화가 잘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과묵함은 미덕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까. 빚만 없다면 서로 좋아하는데 결혼하면 된다고 말하는 단순명료함이 매력인 남편은 나에게 집을 마련해 줄 사람이었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 새색시답게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꾸 물건을 집어던지고 싶어졌다. 아무래도 남편과 내가 만든 가정에서 아이를 낳지 않고는 내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 같아 아이를 낳았다. 집에 꼭 필요한 존재인 엄마가 되었다. 그런 내가 내 마음에 드는지는 생각거리도 못 되었다. 빡치고 힘들지만, 애 엄마가 된 이상 작은 행복과 평안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불합리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이다.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는 건 가정의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정도 살면 된 걸 수도 있다. 지방 소도시의 자가 아파트, 꼬박꼬박 나오는 남편의 월급, 건강하고 귀여운 아기. 남편과 아이를 위해 소고기뭇국을 끓이고 등원룩으로 딱 맞는 옷을 입고, 때때로 동네 친구들과 브런치를 하며 수다를 떨고, 요가를 배우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다면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집을 갖고 싶다는 나에게 남편은 말했었다. “네가 언제 좋은 집에 살아봤다고 그러냐?” 주제 파악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는 너야말로 주제에 나 같은 여자랑 살면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니? 말하지 못했다. 나 같은 여자. 어떤 여자? 남편보다 가방끈이 길고 말을 잘하는 여자? 남편보다 젊고 날씬한 여자? 그게 무슨 가치가 있긴 한 걸까? 내가 매일 청소하고 설거지하는 집, 남편의 집. 싸울 때 “너는 너희 집에 가라.”라는 소리를 들은 이 집. 나에게 갈 집이 어디 있단 말이냐? 집이 없으니까, 너랑 결혼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지지고 볶는 거 아니겠느냐?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하고 나는 엉엉 울었다. 이 집에서 내 자리가 있나? 소파나 식탁 의자? “우리가 만약 헤어지면 나는 빈털터리야. 전부 당신 거니까.” 언젠가 내가 한 말에 남편은 상처받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했다. 사실이 그러니까, 집도 차도 모두 남편 이름으로 되어있고 나는 전업주부인걸.


통하지 않더라도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남편에게 서운함을 표현하는 방식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나는 아내로, 여자로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사랑받기만을 바라면서 모든 걸(이를테면 가진 게 없는 자의 강한 자존심)을 제쳐두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너는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말을 반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비루해질지언정 솔직하게는 살았던 나는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우리 사이의 환상을 몽땅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 “당신이 집을 해준다고 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 집을 해온다고 하는 남자들과만 선을 본 거야. 그러니까 결혼할 때 바로 집을 못해준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마주 앉아 냉동 버팔로윙과 맥주를 먹다가 남편의 흔들리는 동공을 빤히 보았다. 순진한 남자 같으니, 내가 자기를 얼마나 우러러본다고 여겨온 걸까. 1년 내내 식모 취급을 당해도 어쩌다 꽃다발 한 번 사주면 눈동자에서 하트가 뿅뿅 나올 거라고, 그거면 행복한 아내라고 믿었던 게 분명했다. 사치 없고 겸손한 모범생 출신의 아내가 ‘취집’을 꿈꾸는 속물이었다니 충격이었겠지. 3살 아기는 콩순이를 보며 얌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하얀색 벽들과 밝은 나무색 바닥으로 번듯한 새 아파트. 이 아파트에 살기까지 쓰러져가는 시골 흙집, 화장실 없는 단칸방, 주방에는 쥐가 나오고 욕실에는 지렁이가 나오는 집, 벽 전체가 검은 곰팡이로 뒤덮이는 집에 살아왔는데 번듯한 집을 바라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살아온 대로 더욱 서민적인 환경에 만족하며 살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안 죽었나? 가진 것 없어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면 된다고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가 아직도 죽지 않았나? 네가 언제 좋은 집에 살아본 적이나 있냐고 비꼬았던 남편의 말은 내 목소리와 같았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서 비싼 집을 욕심 내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나에게는 내 자리가 필요해. 내 자리는 내 명의 재산이야. 로또 공상에 빠질 때나 생기는 나의 재산. 재산 없이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할 때마다 변명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물질적 풍요에 욕심내지 않는 청렴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는 옛날이야기들이 뼛속까지 스며들었을까? 하지만 이야기 속 인물 포지션을 잘못 잡았다. 나는 안빈낙도하는 선비가 될 수 없다. 나는 선비의 뒤치다꺼리를 담당하는 아내여야 하니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살림과 육아의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치면 무엇하나요? 입금이 안 되는데.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보아도 발밑이 흔들리는데. 불안과 불만을 알약으로 잠재우고 의식은 허구와 인터넷 세상으로 보내며 버티는 생활에 뚜렷한 한계가 보인다. 자리를 옮길 때가 다가오고 있다. 가구처럼 가만히 머무르고 싶어 결혼을 선택한 나에게 너무 많은 물음표가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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