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 외로움

외로움이 다 무엇인가요

by 원효서


평생 혼자인 적이 없었다. 시골에서 대가족으로 살 때에는 할머니와 꼭 붙어 잤고, 열두 살부터 서른이 넘도록 여동생과 한방을 썼다. 자기 전에 나란히 누워 만화영화 주제가를 부르고, 천둥이 치는 밤이면 산비둘기처럼 꼭 껴안고 잤다. 사춘기가 되어도 우리는 한 이불을 덮고 잤다. 라디오에서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테이프에 디바의 노래를 녹음하며, 모든 밤을 함께 했다. 밖으로 돌아다니는 나와 집에 붙어있는 동생은 성격이 완전히 달랐지만, 늘 꼭 붙어서 잠들었다. 20대 중반부터는 따로 방을 쓸 수도 있었지만 한 침대에서 잤다. 혼자 잠드는 건 무서웠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얌전히 자는 여동생 옆에서 뒤척대다 잠드는 게 내 습관이었다. 어쩌다 혼자 자는 날에는 투니버스 채널을 틀고 불을 밝혀야 잘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추위도 더위도 잘 견뎠지만 외로움을 잘 느끼는 체질이었다. 도무지 혼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살아왔다. 툭하면 외로웠다. 학교에서 거들떠보지도 않던 외톨이 아이네 집에 놀러 가고, 누구라도 내 집에 데려가려 했다. 골목을 서성이며 아는 얼굴을 찾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친구네 집을 몇 번이고 찾아갔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 느린 걸음으로 걸어 다니고, 집 앞 놀이터 비탈에 쭈그리고 앉아 뛰어노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집에는 할머니나 엄마가 동생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 중 누구도 나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집 자체가 남루하다는 게 이유라면 이유였을까? 집에 가기 싫은 기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쭉 이어지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매달리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무진장 애를 쓰며 문자를 보낼 때도 쿨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여도 괜찮아 보이는 씩씩한 친구들이 부러웠다. 다들 나의 절박함을 눈치챌까 전전긍긍했다. 내 마음을 챙겨 담을 줄 모르는 내가 모지리같아 부끄러웠다. 밖에서 오래 머무르면 사람을 고르기가 어려워진다. 원하는 사람은 보통 멀리 있어서 곁에 있는 사람에 맞추게 되었다. 나보다 더 외로워 보이는 사람과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외로운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한 계급의 선이 있었다. 흘러넘치는 술자리에서는 많이 웃었지만 나 자신도 줄줄 흘러내렸다. 술 마시지 않는 친구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처럼 단짝 친구도 있었지만, 사람들과 헤어지고 집에 오면 만나기 전보다 더 외로웠다. 아무도 곁에 없을 때에는 어떤 날의 ‘초생달’을 들으며 오래오래 걸었다. 왜 외로운지 고민하면 더 외로웠고,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고 하는데 나는 왜 유독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가 싶으면 내가 싫어졌다.

내 외로움은 볼썽사납게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연애 중에는 함께 하는 시간이 설레는 만큼 헤어져 있는 동안 울적했다. 가장 잔잔하고 평화로운 순간들조차 쫓기는 사람처럼 내달리는 정신머리는 불안에 떨었다. 언젠가 끝날지 모르는 연애에 목숨을 거는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도 속수무책으로 관계에 휩쓸렸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더 이상 연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안정감을 주었다.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가능성을 완전히 닫고 한 사람이 아닌 가정에 충실해지는 결혼생활. 괄호 안에 들어간 듯 틀에 박힌 조용한 삶에 그림이며 책, 피아노 같은 취미와 비슷한 처지의 동네 친구를 채워 넣자 더는 외롭지 않았다. 마침내 돌아가고 싶은 집이 생겼고, 헤매는 느낌 없이 산책할 수 있는 삶을 얻었다. 이쯤이면 되었다 싶을 때 아이가 생겼다.


아이가 태어나고 기껏 만들어둔 루틴을 잃자마자 외로워졌다. 남편도 여동생도 동네 친구도 내 처지에 공감하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키우는 친구가 없었다. 나에게 아이가 없던 시절에 갓난아이를 키우는 친구를 만났을 때마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알아서 홀로 지내려고 노력했다. 아기띠를 하고 동네를 걸으면 마주치기 싫었던 학부모라도 길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두리번거렸다. 아기가 귀엽다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가웠다. 계란빵 트럭 아저씨가 건네는 인사에도 길게 대꾸했다. 사이비 포교인들에게도 여러 번 붙잡혔는데 그들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외로움에는 선이 있으니까. 등·하원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누는 엄마들을 부러워하며 한참씩 쳐다보았다. 맘카페에서 또래 아이를 키우는 채팅방에 들어가기도 하고, 문화센터에서 만난 10살 어린 엄마와 커피도 마셔봤지만, tmi를 대방출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후회했다. 잘 맞는 사람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아기는 사랑스러웠지만 육아는 힘겨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는 아기를 다정하게 달랠 수 있는 걸까? 아기와 눈빛으로 소통할 수는 있는 걸까? 이유식을 거부하는 아기에게 화를 내는 내가 쓰레기 같았다. 죽고 싶거나 무기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슬픔과 외로움은 우울로 가라앉지 않았다. 고립의 고통은 남편을 향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이대로 내가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싶을 때 정신과에 갔다.


0세 반에 빈자리가 있으니 등록하라는 원장님의 전화가 나를 구원했다. 아기는 첫돌 직전에 어린이집에 등록했다. 아침부터 4시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놀았다. 영화를 세 편씩 보고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다. 요가원에 등록하고 카페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동네 친구들과 긴 시간 수다를 떨고 여동생과 브런치를 먹으러 다녔다. 하원 시간이 다가오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남편과 집안일이 귀찮아도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아이를 돌봐주는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학부모가 되어, 주말이면 혼자가 될 수 있는 월요일 아침을 간절히 기다렸다. 나에게 외로움은 사치재가 되었다. 라디오에서 장필순의 노래를 처음 듣던 열다섯 살 밤, 나의 외로움이 너를 부른다는 가사를 곱씹을 때처럼 외로움은 특별한 단어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밭둑을 찾아가 고음이 올라가지 않는 동요를 외쳐 부를 때 본 노을, 꾸덕꾸덕하게 마른 논흙을 조각칼로 파던 초저녁의 찬 바람, 순간의 시간이 한없이 늘어나며 내 안으로 빠져들던 어린 시절의 고독이 그리웠다.


오래 박혀 있던 외로움은 말이 되어 터져 나왔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친구와 동생으로는 부족해서 책방과 도서관 모임에 가서도 실컷 이야기를 풀어냈다. 웃다가 화를 내다가 다른 이들을 웃기려 애쓰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임이 끝나면 반드시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자꾸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외로워 보이는 사람이 남들이 듣기 원하지 않는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공포에 질렸다. 그 사람에게서 내가 보였다. 아무나 붙잡고 하루 종일 말하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생각을 주워 담아 정리하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질리지 않게, 내가 나에게 질리지 않게, 외로운 사람이 되지 않게. 혼자가 되는 걸 돌아오는 기분으로 느끼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야 나 홀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는 삶에 자리 잡은 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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