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를 미워하지 않으리

듀오링고 친구들을 떠올리며

by 원효서

과몰입 없이 열심히 하는 일이 가능할까? 마음을 쓰거나 기분에 휘둘리지 않고 작업 자체에 전념한다는 개념은 나에게 낯설다. 벼락치기로 단어를 외우고 시험 문제를 풀 때에는 다른 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언제나 딴생각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험을 치는 급박한 순간에도 불안 베이스의 여러 감정이 일어나지만 어떻게든 감정을 눌러내며 문제 풀이로 돌아오는 것이다. 시험 하나는 한 시간이면 끝나니까 할 만하다. 수업시간도 시험 시간과 똑같은 50분이지만, 대부분 지루하기에 몰입도가 낮다. 이때는 선생과 교과과목을 향한 불만이 피어오른다. 책 귀퉁이 낙서는 짝에게 보내는 쪽지로 발전하고, 너그러운 선생일 경우에는 예의 없이 구시렁대기도 서슴지 않는다. 한자의 형성 원리를 배우던 날 무심결에 "자알 갖다 붙인다."라고 말했다가 눈이 수리부엉이 같던 한문 선생에게 크게 혼날 뻔한 적도 있었다. 표의 문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순수한 감탄에 억지스러운 암기법을 역설하는 선생님을 향한 비아냥이 섞인 게 문제였다.


그러려니가 없는 내 삶에는 엔피씨가 없다. 같은 반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호감이나 미움이 묻어있었다. 한 번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아이에 대해서도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이 있었다. 학교나 선생들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도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의도하지 않았지만 몇 번이나 담임의 별명을 짓기도 했다. 한두 번 말했을 뿐인데 목소리가 큰 짝이 소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목소리가 큰 짝은 내가 견뎌야 하는 학교 생활 가운데 하나였다. 너무 나댔고 너무 나에게 친한 척을 했고 너무 시끄러웠지만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마흔이 넘어서 고등학교 교실을 떠올리는 건 듀오링고 덕분이다. 공부 친구랄까, 등장인물이랄까, 대화문이라면 응당 등장하는 톰과 주디(90년대 느낌)의 캐릭터들이 내 안의 무언가를 또 깨우고야 만 것이다.

여유롭고 느긋하지만 행운이 따르는 린, 그런 린과 대조적으로 매번 재재대며 바쁘지만 실속 없는 비, 그런 비가 잔소리해 가며 돌봐야 하는, 해맑기 짝이 없는 싱글파파 에디와 밝은 기운에 과다한 에디의 아들 주니어, 깨발랄한 여고생 자리와 시니컬한 아웃사이더인 절친 릴리, 과거가 수상한 멋쟁이 할머니 루시와 최고의 드라마퀸 오스카! 어쩐지 존재감이 약해 언급을 잊을 뻔한 비크람까지... 이들 모두 나의 영어 공부 친구들이다. 듀오링고 스토리 진행 대화는 대충 이런 식이다. 파워 J인 비가 세세하게 시간표를 짜서 공유하면 린은 심드렁하게 따르는 둥 마는 둥 한다. 린의 돌발행동으로 비의 계획은 뜻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지만 늘 운이 따르는 건 느슨하기 짝이 없는 린이다. 거 봐, 즐거운 우연! 럭키! 하고 대화는 마무리된다. 나는 비에게 감정이입했다가 린에게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든다. 모로 가도 서울에 가면 된다는 식으로 행운에 감사할 수도 있겠으나, 비의 정성 못내 안쓰럽다. 때로는 놀 때조차 여유가 없는 비를 보며 가슴이 갑갑해지지만.

우당탕탕 요리를 망치고 청소를 망치는 에디는 못 말리는 낙천주의자이다. 하하하! 다 망했지만 어떠냐! 다음 기회에 잘하면 되지! 목소리도 호방한 에디와 철부지 주니어의 대화도 나를 한숨 쉬게 한다. 뭐 하는 짓이야, 쯧. 혀를 차고야 만다. 건강하고 여유로운 노년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루시는 가끔 젊은 시절 타령만 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괜찮고 그나마 자리와 릴리는 사랑스러운 여고생 느낌이라 거의(?) 좋아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못 견디는 캐릭터는 오스카! 이름도 드라마틱한 오스카는 자아가 비대한 아티스트이다. 나는 세련된 사람이야, 나는 예술가야, 아무튼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썸씽스페셜이야! 라고 온몸으로 부르짖으며 부끄러운 대사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아무리 루시가 핀잔(?)을 주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이의 작품에 혹평을 하다 본인과 마주치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단어에만 꽂혀서 브래지어를 스카프로 두르고 행사장에 가기도 한다. 하지만 듀오링고 세상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법. 면전에서 혹평을 들어도 작품 주인은 오스카의 대담하고 솔직한 평가에 감사한다. 브래지어를 목에 두르고 온 오스카의 스타일링에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비웃음이 아니다), 매장 매니저는 오스카에게 감사인사까지 전한다. 허허허, 오스카야. 너는 삶이 참 즐겁겠구나.

듀오링고는 오늘로 157일째, 영어 93 레벨까지 부지런히 왔다. 오스카와 에디의 말투나 목소리가 거슬릴 때에는 일본어와 음악, 수학 파트로 주의를 돌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일본어는 음성이 부자연스럽고 캐릭터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 오히려 감정적 몰입이 되지 않았다. 수학과 음악에는 캐릭터의 역할이 없어 그것도 그것대로 편했는데, 음악에서는 오스카의 선곡(?)이 내 취향이라 미움이 덜해졌다고나 할까. 음악과 일본어 업데이트 분량을 모조리 마친 요즘은 음악 별 3개를 향한 집념으로 매일 좋아하지도 않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리키 마틴과 엘비스 프레슬리는 정말이지, 리듬게임이라도 견디기 힘들다.


안테나를 꺼야 한다. 당장 쓸 정보가 아니면 끊어낼 수도 있어야 한다. 잘 알고 있지만 좀체 안 된다. 그저 npc에 불과한 캐릭터들에게도 마음을 주니, 어디 느긋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 마음을 느끼지 않는 법은 없나? 매 순간 아이, 좋아! 에잇, 싫어! 하지 않는 법은? '아하, 내가 또 캐릭터한테 과몰입해서 열불이 터지는구나.' 하고 깨달아도 미움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살아나는데, 그 불을 끌 방법은 없나? 하지만 그 불이 꺼지고 나면 몰입을 향한 열정도 꺼질 게 분명하다. 이번 주에도 다이아몬드 리그에서 강등되고 싶지 않은 나의 열망이 꺼져버리면 영어공부도 시들해지겠지. 시들시들하느니 팍팍 열불을 내볼까? 오늘도 듀오 캐릭터들은 어떤 불만도 없이 같은 역할을 수행할 테니, 나도 공부하는 캐릭터로 접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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