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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 좋은 날

지난주 일기

by 원효서

11월 13일 목요일


기운이 올라와 짧은 경조증 기간이 아닐까 의심하며 후딱 아침 설거지를 마쳤다. 이런 날은 요가를 하러 가면 딱인데, 목에 있는 딱지 때문에 도저히 무리라고 판단하고 식탁에 앉았다. 읽고 쓰고 그리고 움직이는 삶을 추구한다고, 고상한 버전으로 나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나를 지배하는 루틴은 설거지이다. 팟캐스트에서 집안일 이야기를 하다가 확실히 깨달았다. 설거짓거리가 쌓인 개수대를 보며 화를 내고 자기혐오로 쌍욕을 하거나, 텅 빈 개수대를 보며 심호흡을 하고 자기 긍정을 하지 않는 날이 없다. 쌍욕은 입 밖으로 나오고 긍정은 묵음의 혼잣말이다. '어젯밤에 설거지를 하다니, 정말이지 훌륭하다. 덕분에 오늘은 죽고 싶지 않은 아침.'


식기세척기를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건조기에서 빨래를 꺼내 정리하는 게 귀찮은 나에게 식세기는 또 다른 일거리가 되겠지. 집안일에 쓰는 돈은 또 얼마나 아까운지 모른다. 새 기계라고 들여봤자 컴퓨터나 티브이처럼 재미난 것도 아닌데, 거금을 쓰려니 아깝다. 좋아봤자 내 일거리인데 싶어서 사기 싫다.


남편이 야간근무일 때는 눈뜨자마자 밥 차려주는 게 제일 곤욕이다. 다른 때는 배달이라도 시키는데 아침 7시라 꼼짝없이 집밥, 이놈의 밥상 차리기가 싫다고 10년 넘게 외쳐봤자 소용없는데 설거지처럼 밥통 열 때마다 또 쌍욕을 하는 게 못할 노릇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이틀 된 김치찌개와 14시간 된 밥이 있어서 일이 쉬웠다. 아이는 식빵, 나는 모닝빵에 딸기잼을 발라먹어 설거지도 적었다. 여동생이 사 준 커피플레이스 드립백도 아주 맛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데 데일리친구가 아침부터 사과전화를 했다. 어제 복엇집에서 출입문을 활짝 열고 떠나가는 손님들에게 몇 번이나 문 닫아달란 부탁을 했는데, 통하지 않았었다. 친구가 화를 벌컥 내며 일어나 씩씩대며 문을 닫았고(이 모든 일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마이 화를 내노~"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웅, 복어 맛있어!" 하며 웃는 모습이 귀여워서 둘이 깔깔 웃었었다. 친구는 자기가 화낼 일도 아닌데 갑자기 화를 내고 또 갑자기 낄낄 웃고 한 게 너무 미친년스러워서, 언니가 너무 부끄러웠을 것 같다고 했다. 나도 몇 초 정도야 과하게 화를 낸다고 느꼈지만, 쌍욕을 한 것도 아니어서 괜찮았는데 아침 8시 반에 사과전화를 건 친구가 웃겨서 또 깔깔 웃었다.

"자기야, 정신병이세요."

언니는 책방에 친구들이랑 고상하게 노는데 나 같은 무식한 애랑 어쩌고 하는 타령에 와하하 웃고, 동네 걱정을 한바탕 한 다음에 전화를 끊었다. 쌍욕을 달고 살 지언정 고상하게 보이는 면도 확실히 있나 보다 싶어 은근히 으쓱한 마음도 재미있는 아침.


못 나가는 날에는 꼭 햇빛이 엄청 좋더라. 블라인드 내리고 영화나 봐야겠다. 영화를 찾다가 갑자기 먹고 있는 약의 정확한 이름이 궁금해서 찾아봤다. 시탈로정(항우울)과 인데놀정(항불안)이었다. 조금 더 찾아보려니 귀찮아졌고 네이버에 접속하자마자 가열식 가습기(비쌈)를 살지 말지 고민이 이어져서 황급히 창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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