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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일기

이런 저런 중요하지 않은 생각들

by 원효서

11월 8일 토요일

티모시 샬라메를 언팔했다. 1950만 명 중 하나인 내가 언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내 입장에서는 유일하게 팔로우하는 남자 영화배우가 없어진 거라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관심사가 아닌 농구 업데이트가 많은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는데, 까까머리 사진이 계속 올라오니까 견딜 수 없어졌다. 그래, 배역 때문인 거 알지만, 뭐 나는 눈 즐겁자고 팔로우한건데 이런 식이면 곤란해. 그래도 한 달을 참았는데 '논란이 된 오스카 어쩌고 발언'을 보고나니까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상 못 받는다고 징징대는 건 정말 꼴불견이란 말이다. 듄 파트3을 고대하고 있고, 눈에 띄는 족족 영화를 보겠지만 그래도 작작해라.


마을호텔에서 자고 라면 축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적한 카페 걷다보면에서 종일 머물렀다. 딸은 쿠키런을 정독하고 나는 "여름밤 열시 반"을 읽었다. 책봄에서 책 찾아오는 길에 단풍든 벚나무를 구경하는 시간이 좋았다. 막히는 시내 길을 피하느라 두르고둘러 집에 왔고, 남은 부추전을 데워 밥을 먹었다. 7시에 오기로 한 중3은 또(거의 매번) 수학 학원이라며 수업 시간을 잊었다고 했고, 아무리 예뻐하는 학생이지만 오늘은 역정이 났다. 그래도 다음주에 시험이라 별 수 없이 애를 재우고 9시 반에 수업해주기로 했다. 애들 처지도 알겠고 국어 과목이 만만한 것도 알겠고 내가 편한 것도 알겠지만, 시간표 변동도 작작해야지. 나는 파워 제이란 말이다.


일찍 잠든 애 옆에 누워서 대구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일찍 도착해 병원 옆 스벅 리저브점에서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실 것이다. 파워 제이니까 사흘 후 일정도 다 짜두었다. 이제 수업준비를 해야지. 9시 38분에 연락했더니 결국 또 내일 온다는 중3. 나도 수업을 미루고 싶으니까 화가 나면서도 재빨리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오든말든 멋대로 하겠지. 내 시험이냐, 니 시험이지. 빡치지만, 누워서 빅뱅이론이나 보다가 자야겠다. 남편은 또 아프리카티비 노래자랑을 틀어놓고 의자에서 목이 꺽어진 채로 코를 골고 있다. 10년째 보는 꼴에 관성처럼 또 어깨를 툭툭 쳐서 누워자라고 말했고, 남편은 혀가 마비된 사람처럼 뭐라 대답을 했지만 그 모양 그대로 자고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제는 몇 번 더 눕히려 애쓰지 않고 내가 자는 방문을 꼭 닫는다. 코고는 소리와 음질 나쁜 방송 소리를 차단하는 게 남의 숙면 장려보다 중요하다.



11월 9일 일요일


뜨거운 방귀는 냄새가 지독하다. 오후 늦게 메가커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허리가 조이는 반바지를 오래 입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저녁때 화가 치솟아 설거지거리를 내버려두고 오랜만에 필요시 약을 먹었다. 소파에 누워있다가 아몬드밀크를 한 잔 마시고(배는 고팠지만 먹을 게 없어서) 양치질을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남편에게 등을 두드려달라고 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거실을 서성이며 리타의 일기를 읽고 트림을 하고 방귀를 뀌었다. 고무줄 자국이 깊게 난 1킬로 찐 뱃살을 의식하며 몸무게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겠다 싶었다. 평일에 수업 시간을 바꾼 애들 때문에 오늘 3시간 넘게 수업을 했다. 그동안 아이는 유튜브를 실컷 봤다. 중3이 문제 푸는 동안 강배전 진을 읽으며 키득대고 감탄했다. 밤에 팟캐스트를 녹음하기로 했지만 오늘은 말을 그만하고 싶어서 녹음날짜를 이틀 뒤로 미루었다.


아이가 잠들었고 프랑켄슈타인을 큰 화면으로 보고 싶지만 서늘한 거실에 나가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남편의 카톡알림이 시끄럽다. 전기장판에서 꾸물대다가 잠들어야지. 내일아침에는 씻고 요가를 하러 가고 싶은데 어쩐지 자신이 없다. 손가락에 끼운 고정대(?)가 불편하다. 땀이 차서 자꾸 손가락이 가려운데 새끼손가락을 긁기가 어렵다는 걸 알았다. 뼈는 붙었지만 둘째마디는 구부려지지 않고 첫째마디는 펴지지 않는다. 새끼손가락을 위해 재활이라도 받아야하는 걸까. 문득 시시하고 안락한 인생이라는 감상이 들었다. 힘든 일도 많았고 죽고 싶은 적도 죽이도 싶은 적도 많았지만 요즘 찬찬히 돌아보면, 살면서 이만큼 평온한 때는 없었다. 여전히 강박과 불안 때문에 처방약을 먹고 있지만, 병원에 다니며 약을 꾸준히 먹는다는 사실도 평온한 삶의 증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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