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많이 가는 올해
국도 곁에 있는 논에는 털고 남은 지푸라기들이 누워 있고, 사과밭에는 샛노란 상자와 은색 사다리가 놓여 있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따내리고 나면 찬서리가 내릴 때마다 과수원 나무들이 색을 잃는 계절이다. 산은 가을색으로 물들고 마른바람이 부는 11월이다. 자연히 쓸쓸하고 덧없는 감상에 빠지는 일이 잦아진다. 특별히 이루고자 하는 바도 없었지만, 뭐라도 이루지 못한 한 해를 돌아보기 시작하는 것도 11월, 희미해져 가는 수능 시즌의 스산함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히 11월. 별다른 집안 행사도 공휴일도 없는 까만 글씨 빼곡한 11월에 조바심을 느끼며 아침 일찍 병원으로 출발했다.
구미에서 유방외과를 예약하기 힘들어서 지난달 대구에 있는 병원에서 유방 초음파와 조직검사를 했다. 양성 섬유선종과 중증 유관 증식증, 급한 건 아니지만 섬유선종 모양이 삐죽삐죽 좋지 않아 제거하는 편이 낫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수술비가 비싸서 실손보험을 혹시 못 받으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아서 서둘러 날을 잡았다. 금세 끝나는 간단한 시술이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들었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1박으로 입원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철없는 바람도 있었지만, 오후 3시 반에 퇴원해서 스타벅스 커피를 기다리며 이걸 쓰고 있다.
조직 검사 때에도 시술 때에도 모든 순간 다정한 병원이었다. 마취주사를 놓을 때 아기를 다루듯 팔뚝을 쓸어주는 게 여성 병원의 매력이랄까. 입원실도 깨끗하고 쾌적해서 코를 골며 푹 잤다. 뭘 좀 쓸까 싶어 가져간 노트북으로는 드라마를 한 시간 보고 거금을 결제(내가 가진 카드는 무이자 할부가 안 되고...)하고 나왔다. 내일까지는 압박 붕대를 둘둘 감고 지내야 한다. 그 후에는 압박 브라를 하고 며칠은 조심해야겠지. 음주도, 요가도, 달리기도 한 주 더 미루어져서 아쉬운 심정으로, 조심조심 지내자. 다음 주에는 늦가을 정취를 편히 즐기며 많이 걸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