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보면 내 일인 줄

남의 일에 대신 화내고 자꾸 기운 빠지네

by 원효서


"그럴 수도 있지." "이런 일도 있네." 이렇게 생각하고 "오케이, 거기까지." 이렇게 넘어가는 일도 있다. 부정적 감정 이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나도 어지간히 지쳐가는 중년 여성이다. 엄마 말대로 나는 화가 나면 팔딱팔딱 뛰는 사람이었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를 몸소 보여줄 수 있었다. 싸움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 미치고 팔짝 뛰는 모습은 가족들만 알고 있었지만.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상한 홍합처럼 입을 꾹 다무는 사람들도 있는데(대표적으로 엄마), 입만 다물었다 뿐이지 할 수 있는 모든 비언어적 수단으로 감정을 표출하기 마련이다. 눈빛, 숨소리, 돌아앉은 등과 어깨의 뻣뻣함이 주변 공기까지 굳게 만든다. 공기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고 살면 좋았겠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억압된 분노와 수동 공격의 분위기를 잽싸게 읽어내던 나는 언제부턴가 남의 일에 사건 당사자보다 더 화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 자신이 겪은 일도 마찬가지. 열받는다고 입을 다물어버리면 주변 사람들이 곤욕이기 때문에 반드시 뒷담화로 해결했다. 직장 일은 집에, 집안일은 친구에게, 학교 친구 일은 온라인 친구에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뒷담화를 잘하는 만큼 잘 들어주었다. 엄마가 당한 시집살이, 동생이 회사에서 겪은 억울한 일, 친구들과 학생들이 겪는 불쾌하고 우스꽝스러운 사건들에 내 일처럼 마음을 썼다. 언제나 진심이었다.

내가 버럭버럭 화를 내주면 그 일을 겪은 사람이 속 시원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답답한 마음에 나를 붙잡고 뒷말을 하긴 했지만 차마 그만큼은 욕할 수 없어서 머뭇댈 때, 나는 언제나 한걸음 더 빨리 욕을 던졌다. "야! 그거 아주 미친 새끼 아니야! 돌았나, 진짜!" 이것도 진심이었다. 보통 남들 앞에서 큰소리를 내지도 않는 애들이 얼마나 답답하면 나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겠는가? 심지어 뒷담화하러 와서도 쌍욕은 하지 못하는 고상한 여자사람들, 내 그대들을 위해 기꺼이 화를 내어 주리라.


'찜찜하고 애매한데 기분이 좋지 않고 밤에 누우면 자꾸 생각나는 일들'을 듣고 상황을 분석하는 일, 맞장구를 치며 못된 인간의 못된 점을 정확히 짚어내는 일, 못된 인간과 당한 사람의 관계성을 알아내고 못된 인간이 진정 나쁜 놈인지 모자라지만 착한 친구인지 판별하는 일. 나는 이런 일을 기꺼이 해왔다. 어떤 전문가도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의 단점을 잘 보고 자기혐오와 자기 의심을 기저에 깔고 살아온 사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제 인성의 바닥을 알고 인정할 줄 알면 얻게 되는 능력이랄까?


사람을 잘 보는 능력과는 다르다. 그저 내가 마음 쓰는 누군가가 속상해할 때, 속 상하게 한 나쁜 놈을 정확하게 욕하고 싶을 뿐이니까. 어떨 때는 실컷 마음 쓰던 사람에게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이를테면 엄마가 알려준 사실을 바탕으로 아빠를 평가하자 "너도 성격이 참 이상하다."라는 말을 듣는다거나, 친구가 나를 불러내 그놈 이상한 놈이라고 욕하기에 왜 이상한지 구구절절 풀이하고 이상한 놈을 욕했더니 "나는 그렇게까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난 별로 화나지 않았어."라고 맑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든지.

어디까지 대신 화를 내어야 적당할까? 메아리처럼 맞장구만 치면 되나? 아니지. 당당하게 찾아가서 싸우라고 말해야 하나? 그러면 이 세상은 굴러갈 수 없을 텐데? "앞에서 못 할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아라." 따위는 남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나는 할 말은 하고 산다."라고 큰소리치는 인간들은 강약약강의 비굴자들이기 마련이다. 남들에게 무관심하고 사람을 도구취급하는 인간과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는 인간들에게 상처받은 친구들이 험담을 하기 위해 나를 찾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니 뒷담 하러 온 사람에게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기쁨을 잘 나누지 못하니 고통에 말 얹어주는 정도는 잘해도 되지 않아?


동네친구가 해준 이야기이다. 중학생 때부터 친구인 아이가 있는데, 시부모가 시누이 자식과 자기 자식을 지독하게 차별한다고 했다.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밥상에서 음식 주는 걸로 차별을 했단다. 옛날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처럼 시누이 자식 앞에는 고기반찬을 밀어주고 하는 식으로, 자기 자식 차별당해서 속상한 일에 이골이 난 그 친구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난 이제 속상하지도 않고 그러려니 한다."라는 말을 습관 삼아 내뱉는다는데 본인이 그러려니 하든지 말든지 동네친구는 열불이 터져서 "밥상을 엎어버리지 그랬냐!" 하고 전화통을 붙잡고 소리를 쳤단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속상하지도 않고 그러려니 한다면 친구한테 전화는 왜 했으며, 일일이 말은 왜 하는 걸까? 친구가 대신 화를 내어주니까 하는 거잖아. 속상한 마음도 알겠고, 하나하나 화내고 싶지 않은 그 노력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동네친구에게 말했다.

"우리가 화 잘 내주는 거 알고 다 자꾸 와서 이야기하지? 지들은 고상하게 넘어가려고 하고 우리만 더러운 말 하게 하고, 아주 화를 맡겨놨지! 우리도 우리 일로 화나는 일 천지라고. 이제 기운도 없다고."


깔깔 웃고 넘겼지만 이틀째 곰곰 같은 생각 중이다. 그러니까 친구들아, 뒷담할 때만이라도 당당하게 좀 화를 내보면 어때?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 기운 빠지게 하지 말고. 대신 화내다가 뭐 하는 짓인지 맥 빠지게 하지 말고. 화나는 일이 생기면 화가 난다고 말을 해. 그래야 같이 화를 내는 거야. 그래야 같이 화를 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