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가만히 있어도 자꾸 생각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니

by 원효서


왜 너의 무례를 다 웃어넘겼을까? 내가 너를 가엽게 여겨서 그랬겠지. 네가 나를 의지하는 것에 나는 기분이 좋았나 봐. 뭔가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기분. 내가 무슨 역할을 했을까? 대신 욕해주는 사람, 대신 화내주는 사람, 너의 말대로 '너의 마음을 읽어주는 사람', 위로해 주는 사람.

나는 너에게 무엇을 기대했을까? 돈벌이가 되는 일, 솔직한 마음.

쓸수록 모르겠다. 네가 나쁜 사람이라고, 내가 상처받았다고 쓸 수가 없어서 어렵다. 이런 사람을 만나서 이런 경험을 하고 그렇게 또 세상을 배우는 거라고 몇 번이나 같은 결론으로 넘어가려 애쓰지만, 정리에는 시간이 더 걸린다. 정확하지 않은 기억을 되새기느라 반추하는 일이 불쾌하지만, 그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또렷한 걸.


매주 하는 '회의'는 커피와 빵을 얻어먹으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보는 일. 소꿉놀이처럼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었다. 잘 맞지 않은 사람을 뒤에서 욕하다가 결국 회의에서 내보내야 할 때 힘들었지만,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든든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도 걔가 정말 이상하긴 했잖아? 나중에 너는 그런 걔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나만 또 난리를 쳤었네. 너 역시 걔랑 마찬가지로 칭찬으로 얼버무리면서 몇 번이나 내 선을 침범했는데, 내가 몰랐던 건지 흐린 눈으로 넘어간 건지 모호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내가 하는 일이 별 거 아니라고 여기는 너의 생각에 나도 동의하고 있었다는 것. 암묵적으로 너의 무지와 무시를 허락했다는 것.


터닝포인트(이것조차 너무 늦었지만)가 된 날은 내가 k를 소개했던 날. 내가 좋아하는 카페, 좋아하는 구석자리에서 열성적으로 k를 칭찬하는 너를 보면서 기시감 비슷한 걸 느끼던 그때 나는 이상하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계속 폰을 들여다봤다. 내가 확실히 배운 건 내가 인정욕이 너무 강해서 칭찬에 취약하다는 거였어. 스스로 알고는 있었지만, 나는 훨씬 더 나약했어. 너의 칭찬과 열성적인 말투에 홀랑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그걸 k에게 똑같이 해? 그런 경험은 없지만 비유하자면, 내 남자 친구가 나를 꼬실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여자를 꼬시는 모습을 직관하는 기분이었다고 하면 너는 이해할까? 그게 어떤 기분인지 혹시 전혀 상상할 수 없어서, 무턱대고 끄덕이며 맞장구를 칠까?


아니, 사실은 너의 자기소개가 이상할 때부터?

언니, 그러면 이런저런 일(말도 안 되는) 같이 할 수 있겠어요? 했을 때부터?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너에게 대꾸할 말이 점점 없어지면서부터? "이런 이야기를 써 줄 수 있겠어요?" 하며 10만 원인지 20만 원인지 하는 금액을 제시했을 때에야 정신을 차린 거니? 내가 말이야, 그제야 찬찬히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된 거니? 내 말에 맞장구치는 것은 오직 맞장구일 뿐이었다는 것을 내가 너무 늦게 안 거니? "언니, 만나서 내 마음 좀 읽어줘요." 몇 번이나 만남을 피하던 나에게 너는 이렇게 말했지. 내가 너의 마음을 읽어주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는 걸 니 스스로 말해줘서 그제야 내가 분명히 알았다. 내 마음은 너에게 아무 관심사가 아닌데, 네 마음은 나에게 아무 힘들이지 않고 흘러들어오고 있었다는 걸.


나는 내가 다니는 정신과 병원 링크를 보냈어.

나의 용도. 그게 너에게 필요한 나의 용도.

처음 만난 날 내가 나를 민달팽이라고 소개했잖아.

뭐든지 바로 충격을 받는다고.


당연히 나는 너와 닮은 점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그만큼 친밀했겠으며 그만큼이나 너를 아꼈겠니? 또 이만큼이나 긴 글을 쓰겠니. 사람은 입체적이라고 하고 나도 나를 면이 너무 많은 입체도형처럼 여기지만, 너는 모든 면의 조각이 제각기 떨어져서 움직이는 사람 같아. 하나의 상으로 합쳐지지 않아.


"저는 뭘 잘 따라 해요. 금방 익혀요."

사실 처음부터 너는 나에게 너를 다 소개했는지도 몰라. 공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그래서 친구가 생기지 않는다고, 손절당한 경험이 많다고 했잖아. 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의지만 하는 너에게 왜 그리 늦게 의문을 품었을까? 왜긴 왜겠어. 또 남보다 나를 더 의심해서지. 내가 예민해서 그런가 보다. 확신에 차서 말하는 너의 말이 내 말보다 힘이 있다고 믿은 거지 뭐.


이번에는 산뜻하게 헤어지고 싶어. 나 혼자서라도 말이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