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지고 있어요
3월 13일 금요일
수요일에 그림티 언니들을 만나서 크게 기운을 얻었다. "여기서는 뭐든지 말해도 되지!" "우리한테 다 털어놔." "우리는 뭐든지 다 들어줄게." "우리는 그 시기를 다 살아봤잖아. 다 이해할 수 있어." 이렇게 말하는 언니들이 있다니, 이 무슨 커다란 복이람. 평생 언니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언니가 생겼다. 늘 의지할 어른이 없다고 여기는 내가 어떨 때에는 오만하고, 또 어떤 때에는 답답하지만 대체로는 외로웠다. 시시콜콜해서 말하기 어려운 서운함들을 알아주는 선배들이 있어 든든했다.
어제는 영어그림책 모임에 가서 마음에 쏙 드는 이야기를 읽었다. 아, 멋진 그림책을 사 왔는데 자꾸 잊네.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았다. 깔깔 웃으며 책방 친구들과 놀았더니 기운이 솟았다. 며칠 동안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보았다. 중반 이후로 몰입이 덜 되어 설렁설렁 보았지만, 좋은 드라마였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들이 생생했다. 꿈같은 이야기이지만 그런 꿈을 꾸려고 만드는 게 드라마니까.
부지런히 걷고 토지 12권과 천 개의 파랑을 완독하고 낮잠도 잤다. 며칠 동안 기운을 많이 회복했다.
3월 14일 토요일
남자 사람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나는 평생 남성 대하기를 어색해하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급기야 남자를 무서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뱀이나 지네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초적인 공포는 아니지만, 외국인이나 외계인처럼 소통이 되지 않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그렇게 되었다. 평범한 남자들과 일도 하고 사귀기도 하며 살았는데 내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어줄 남자를 아직 찾지 못했다. 오! 얘는 좀 제정신인가? 해도 이내 곧 그러면 그렇지, 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니 멀리서 거리를 두고 살아갈 수밖에. 다행히 남자 사람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사는 데 큰 불편은 없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남자사람의 생일파티에 간다. 남성이라고는 해도 친구의 남편이니 내 친구는 아니지만, 친인척 아닌 남자사람의 생일 축하는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만나는 행사이다.
ㅡ그리고 파티에 다녀온 다음 날 이어서 쓴다.
극 외향인 가족이 많은 손님을 초대했을까 봐 살짝 쫄았는데, 천만다행으로 내가 모르는 얼굴은 없었다. 아주 친한 친구들과 가끔 인사만 하는 친구까지, 모두 익숙하고 반가운 친구들이었다. 오!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기운차게 생일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건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는 내 친구의 남편일 뿐 나이도 파티가 끝날쯤에야 알았다. 어딜 가도 다 나보다는 동생인 것... 하지만 다들 그를 '배형'이라고 부르기에 나도 호칭을 통일하기로 했다. 배형은 금리단길을 오며 가며 카페에서 몇 번 마주치는 사이였다. 여름보다 한 살 어린 딸아이가 있어서 그 동네에 가면 자연스레 자주 마주치다 보니 어느새 '지인'의 카테고리에 들어갔다. 아내 친구들 사이에 녹아든 존재라는 점이 신선했다. 불편한 기색 없이 아내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남편이 신기하고 낯설어서 호기심도 일었다.
어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는 외향인 가족들은 연신 싱글벙글 잘 웃고 말도 잘했다. 극내향인 하나가 파티 초대를 거절했는데, 해맑은 얼굴로 "내향인 환영이라고 써놨는데?"라고 말하질 않나.(환영하고 주목받으면 더 힘들다고요) "사람이 많으니까 불편할 일 없는데?"라고 하질 않나.(사람이 많으니까 불편하지) 게임하던 어린이마저도 어른들과 소통하며 노는 게 더 즐겁다는 신기한 가족이 토마토 육수 샤부샤부를 해주었는데 이게 또 정말 맛있었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는데 젓가락질을 멈출 수 없었고 와인과 막걸리와도 잘 어울렸다. 바로 토마토 육수 레시피를 새겨듣고 집에서 해먹을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저녁 시간 내내 어린이들을 방에 밀어 넣으며 깔깔 웃고 놀았다. 집주인은 손님들과 눈만 마주쳐도 리듬을 타고 노래를 불렀고, 생일자는 그런 아내의 축하를 받으며 계속 잔심부름을 했다. 내향 강아지와 보호자는 기력을 점점 잃어갔는데 그것도 그것대로 웃겼고, 입 짧은 손님들 놀리는 일도 즐거웠다. 자리에 앉아 술과 안주를 부지런히 먹으며 푹 쉬는 기분으로 놀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늦게 들어와 제대로 못 자고 아침부터 밥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청소기 돌리고 앵무새 카페에 끌려왔는데도 피곤하지 않다. 좋은 사람들과 노는 날에는 내향인에게도 에너지가 차오르는 법이다. 무섭거나 불편하지 않은 배형의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하며, 다음에도 내향인 환영 파티에 언제든 불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