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어야 할 때가 되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에 영어와 수학을 배워야 한다는 아빠의 지시에 따라 보습학원에 다니게 된 것이다. 동네에 신문 배달을 하는 6학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문 영업소 앞을 왔다 갔다 해봤지만 내가 봐도 작고 마른 여자아이인 나에게 일을 시켜줄 어른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일어날 수나 있나. 할머니가 허락은 해주려나. 피아노 학원 다니게 해달라고 아빠에게 부탁하는 건 소용없겠지.
어영부영 날짜가 지나갔다. 피아노 선생님이 준 학원비 봉투는 할머니에게 전해주지 않았고 사실은 학원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도 선생님에게 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린애다운 기대감을 품고 학원에 계속 갔다. ‘선생님이랑 나랑 이렇게 친한데, 나 하나 정도는 그냥 다니게 해주시지 않을까?’ 이상하게 잘 쳐지지 않는 체르니 10번을 배우던 날, 선생님이 같이 집에 가자고 했다. 마침 학원 문을 닫을 시간이고 선생님이 타는 버스는 우리 집 앞을 지나니까 같이 걷자고 했다.
애써 명랑하게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쭈뼛거리며 “할머니가 이제 피아노 다니지 말래요.”라고 하자 선생님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던 것이 떠오른다. “날짜가 열흘이나 지났는데, 말도 안 하고...”
알고 있었다. 내가 매일 피아노 학원에서 오래 놀면서 선생님과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선생님이 소개해 준 교회까지 혼자서 버스를 타고 갔다고 해서 거저 학원에 다닐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학원을 그만두더라도 가끔 놀러 가겠다고, 선생님이 너무너무 좋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편해 보이는 선생님의 눈빛,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고 싶었지만 이제 버스 정류장 앞이었다. 선생님에게 제대로 인사를 했던가? 버스가 먼저 왔던가? 내가 먼저 집으로 왔나? 그다음은 기억에 없다. 그저 한없이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었다.
학원에 취직하고 1년 할부로 전자 피아노를 샀다. 교보문고에 가서 영화 음악 베스트 악보집을 샀다. 10여 년만에 치는 피아노가 잘 쳐질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중 쉬워 보이는 ‘올드보이’의 메인 테마를 그럭저럭 칠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를 가진 대부분의 집이 밟는 과정에 따라 나의 피아노도 장식품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피아노를 보면 ‘그렇게나 기를 쓰고 배우고 싶어 했으면서 결국 뚜껑도 열지 않는구나.’ 하는 자책의 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마음을 주지 않으려고 중고 업체에 20만 원을 주고 팔아버렸다.
미련은 끈질기게 남아 14년도 겨울에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소도시 변두리에 남편과 둘이 살겠다고 왔지만 남편은 나의 생활에 무관심했다. 내 생활은 내가 구해야지, 별도리가 없구나. 과외 수업을 구하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을 했다. 지루하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서 피아노 학원을 찾았다고 하니 남편은 “그래라.”할 뿐이었다.
수선화처럼 화사한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 일주일에 세 번씩 피아노를 배웠다. 옛날처럼 하농, 체르니, 소나티네를 배웠다. 그렇게 어렵던 체르니 10번은 지루할 뿐,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악보를 찾아 좋아하는 곡들을 칠 수 있게 되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피아노를 배우러 온 친구를 만나 매일 보는 절친이 되었다. 피아노 선생님과도 친해져서 셋이서 맛난 것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놀았다. 이사를 하고 집에 여유 공간이 생기자 야마하 키보드를 샀다. 남편에게는 “너는 컴퓨터를 사고 나는 건반을 사겠다.”라고 하니 이번에도 “그래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원에서는 연습할 시간이 부족해 못 치는 곡들은 집에서 연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치고 싶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EnergyFlow도 드디어 칠 수 있게 되었고(좀 많이 버벅대긴 한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 ‘The Hours’의 ost 2번 도 그럭저럭 칠 수는 있게 되었다(어려운 파트는 넘긴다).
피아노 선생님이 학원을 정리하고 이사를 간 후로 나의 연습은 당연히 게을러졌다. 그래도 꾸준히 1년을 배운 덕에 도전할 만한 곡을 찾으면 악보를 찾아 연습을 한다. 최근에 연습을 시작한 곡은 ‘노매드랜드’의 ost 1번 ‘Oltremare’이다. 어려운 곡은 아니지만 역시 셋잇단 음표의 박자는 지켜지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잔뜩 미뤄두고 오랜만에 키보드 전원을 켰다.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곡보다는 많이 느린, 자꾸 음이 어긋나는 ‘Morning Passages’를 연주한다. 기분이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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