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랑 싸우고 있었더라?

이길 줄은 모르고요, 싸움은 피합니다.

by 원효서

누구와 싸우고 있었더라?

평생 남들과 못 싸웠다. 이기는 싸움을 하는 기술을 얻을 수 있다면 돈으로 사 오고 싶었다. 한참 전부터 '거침없이 하이킥'의 박혜미가 되는 게 장래희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으으으음!! 그건 아니죠~ 이건 이. 렇. 게 하는 거라고요. 보세요. 제 말대로 하니까 훠~얼씬 좋죠?" 만면에 미소를 띠고 검지 손가락 하나를 힘 있게 펼쳐 든 그 당당한 모습! 시부모, 남편, 자식, 동네 사람들 모두 박혜미와의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나는 어떤가. 뒤에서는 들은 말을 복기하며 일목요연하게 한 문장 한 문장을 반박하고, 버럭버럭 화도 내고, 다음에는 이렇게 말해줘야지!! 일기를 두 바닥씩 써대지만 막상 맞서야 할 상황이 닥치면 짜증과 신경질이 먼저 튀어나와 상대에게 꼬투리를 잡히기 일쑤다. 마음이 상하면 눈물부터 글썽글썽, 어린아이도 아닌데 누가 달래주겠는가? 에휴, 말해 무엇하겠는가.

거의 모든 상황에 의견이 맞지 않는 남편과의 싸움 역시 맥 빠지는 대사의 연속이다. 오랜만에 감자볶음이나 할까 싶어서 아이와 감자를 썰고 있었다. 아이는 어린이용 플라스틱 칼로 채소 자르기를 좋아해서 내 옆에서 같이 감자를 조각내고 있었다. 물을 마시러 가던 남편이 그걸 보고 무심하게 "조심해라, 칼." 했는데 그 정도도 딱 듣기 싫은 내가 "잔소리하지 마라"라고 대꾸를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남편의 무슨 버튼이 눌러진 건지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마라. 그게 왜 잔소리냐." 하며 눈알에 힘을 팍 주는 게 아닌가. 기분 나쁜 눈빛에 당황해서 잔소리냐 아니냐 몇 마디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얼굴에 놀라고 속상한 티가 났기 때문이다. 감자고 도마고 집어던지고 "기껏 밥하고 있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게 왜 훼방이냐!" 일갈하며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되니까 밥을 해서 먹었다. 유치원 농장에서 캐왔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 아이는 감자볶음을 먹지도 않았다.

또 상상해본다. 박혜미 언니였다면 어땠을까?
"칼이 위험해 보이는 건 알겠어. 그런데 좀 더 부드럽게 말해주면 좋았을 것 같아. 당신 말투가 퉁명스러워서 꼭 나를 탓하는 것처럼 들렸거든. 오케이?"
그러면 남편이 착한 준하 남편처럼 대응할까? 아니야, 아마 이러겠지.
"오케이?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나?"
아, 머나먼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 읽자)의 기술.

사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아까 그렇게 했어야지!’로 시작해서 추억 여행보다 긴 분노의 회상으로 접어 들려는 순간을 잡아채야만 한다. 이깟 일에 짜증 창고의 문이 활짝 열려서 속으로 온갖 상소리와 저주를 퍼붓는 나와 이깟 일에는 의연하고자 하는 나 사이의 싸움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의식의 흐름이 ‘역시 결혼을 잘못했어.’까지 가기 전에 이 싸움을 멈추자. 다른 할 일을 해야겠다.

이럴 때 아이와 놀거나 설거지를 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 또 혼자서 아이를 돌보고 또 혼자서 집안일을 하는 상황은 남편에 대한 화를 끌어모으는 원기옥이 될 뿐, 이럴 때일수록 혼자 할 일을 해야 한다. 아일랜드 식탁에 올라와 있는 에세이집을 펼쳐 든다. 좋아하는 작가가 내가 좋아하는 브람스 곡을 예시로 들며 쓴 재미있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다. 색연필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까 그림 그리고 치우지 않은 팔레트와 붓이 그대로 옆에 있다. 작년부터 꽂힌 색 테르베르트를 세필에 발라서 책에 쓱 밑줄을 긋는다. 카키와 초록 사이에 어디쯤에 있는 그 빛깔이 예쁘다. 이렇게 기분이 나아진다.

결혼 전에 도서관에서 심리치료 그룹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 보는 열 명의 사람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첫날, 나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저는 옛날부터 나 자신과 사이가 너무 안 좋았어요. 그게 너무 힘든 것 같아요. 저 자신이랑 잘 지내보고 싶어요.” 이 말을 하면서 처음 깨달았다. 내가 나와 너무 많이, 아주 오래 싸워왔다는 것. 무언가를 쟁취하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극기가 아니었다. 무작정 스스로를 탓하고 몰아붙이며 내 마음을 그저 감정 쓰레기통으로 학대하며 살아왔을 뿐. 내 마음을 처음으로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깨달았다. 내 마음과 싸우느라 다른 누구와도 싸울 수 없었구나. 내 목소리를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이기기는커녕 의견 충돌을 견뎌낼 힘이 있을 리가 없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나와의 화해가 우선. 한 조각의 자기 확신에 기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하는 내면의 소리를 이겨내고 의지를 쓰레기통에서 건져낼 것. 다른 할 일들을 잠시 뒤로 밀어 두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면서 나를 달랠 것. 그렇게 살다 보면 박혜미까지는 아니어도 만만하지는 않은 중년 여성에 한 발짝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며 이 원고도 써 본다. ‘투고한다고 될 것 같으냐?’라는 마음의 소리를 ‘안 되면 또 어떠냐!’로 제압해냈다.



[웹진] 2W매거진

26호 '나의 싸움 일지'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