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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04. 2022

봄나물에 대한 단상들

장터에서 가죽나물과 두릅 구경을 한 김에 올리는 메모


1. 3월 25일 금요일


시골에 살던 때의 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산에 나물을 하러 간 할머니가 나물 보따리에서 꺼내 주던 '복주머니란' 꽃이 떠오른다.(할머니는 개불알꽃이라고 불렀는데, 예쁜 한글 이름을 다 망치는 게 특기인 일본이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꽃 이름이 그게 뭐니?!)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간 할머니는 오후쯤에 내려왔는데 나물 자루에서 커다란 꽃을 꺼내서 나에게 주곤 했다. 풋풋한 풀내가 나는 줄기, 둥그렇고 보드라운 자주색 꽃송이가 내 손바닥만큼 컸다.
 6학년 때쯤 아빠와 둘이서 골안 밭 앞에 있는 산에 갔던 날이 기억난다. 날씨가 정말 좋은 봄이었다. 고사리를 꺾으러 갔었다. 고사리가 쏙쏙 잘 보여서 즐거웠던 것 같다. 똑똑 소리를 내며 꺾이는 고사리 가지의 촉감이 좋았다. 잘한다고  아빠에게 칭찬도 들었다. 동산을 이리저리 날쌔게 다니던 기억.


2. 3월 26일 토요일


 봄동을 한 번 무쳐먹어야지, 봄나물을 사서 국도 한 번 끓여먹어야지. 늘 마음만 먹다가 봄나물 시즌은 지나친다. 반찬가게에서 사 먹은 봄동 겉절이는 맹숭맹숭한 맛이었다. 어머님이 해주신 냉이 들깨국과 달래무침은 맛있었는데, 이제 다 먹고 없다. 시가에 가면 다시 얻어먹을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번에는 마침 제삿날이라, 전이나 뒤집어야 하는 신세. 나물은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다. 봄나물이 아니야. 어머님이 매년 산에서 해오신 고사리가 특별히 더 맛있긴 하다. 사 먹는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럽고 고소한 맛.


3. 3월 27일 일요일


 쑥을 떠올리면 할머니의 쑥뜸향이 먼저 떠오른다. 매일 말린 쑥을 꺼내서 손바닥이 아리도록 싹싹 비비고 또 비비다 보면 부드러운 쑥 뭉치가 된다. 아기 때부터 늘 할머니와 한 방에 자던 나는 쑥을 비비던 감촉과 쑥뜸의 냄새가 할머니의 담배 연기와 함께 섞여 떠오르곤 한다. 매캐하고 부드러운 쑥뜸 냄새.

 할머니는 뜸이 새카맣게 되도록 뜸을 뜨곤 했다. 아픈 자리에 벌건 자국이 남도록 뜸을 떠서 내가 늘 말렸다. "이제 내려! 뜨거워! 불 끄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은 없었다. 그렇게 뜨겁도록 뜸을 떠야만 피로가 풀렸나 보다.

 쑥뜸 만드는 게 싫어서 심술을 부린 밤도 기억난다. 망할 계집애가 그것도 안 도와준다고 할머니가 화를 냈지만 끝끝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손바닥이 따갑고 정말이지 지루한 일이었다.
 나도 쑥뜸을 많이 뜬 것 같다. 배가 아플 때, 멍이 들었을 때... 뜨거워질까 무서워하면서도 금세 아픈 게 나아지는 그 신기한 기분.


4. 3월 28일 월요일


 남은 나물반찬으로 비빔밥을 해 먹었다. 어머님의 고사리나물은 얼마나 고소하고 야들야들한지... 고사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권해주고 싶을 정도다. 봄나물, 뭐가 좋을까? 나는 역시 그래도 취나물? 친구네에서 얻어먹은 방풍나물이 들어간 전이 참 맛있다.


5. 3월 29일 화요일


 어느새 꽃이 다 피었다. 몇 달만에 기차를 탔더니 철길 옆에 개나리, 벚꽃, 목련이 가득이다. 아차, 오늘이 동네 장날인데... 나물 사러 갈 시간이 없구나.


6. 3월 30일 수요일


 급히 쿠팡 앱을 열어서 봄나물을 검색했다. 취나물, 돌나물, 방풍나물, 곰취, 머위순... 온갖 나물들이 줄지어 나왔다. 빠른 배송이 되는 나물을 두 봉지 담고 아이를 위해 냉동 크로플 한 봉지를 함께 주문했다. 시금치 무쳐 본 것도 언제인지... 나물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걱정이 앞선다. 내일 아침에는 나물을 삶아야지.


7. 3월 31일 목요일


 마흔이 넘어서 처음으로 취나물과 참나물로 요리를 해보았다. 쓰면서도 살짝 놀랐다. 요리에 취미가 없는 편이긴 하지만 어지간히도 안 하며 살았구나. 나물 반찬을 좋아하면서도 반찬 가게에서 사 먹거나 시골에 가서 얻어먹는 게 전부였구나. 콩나물 무침, 무생채도 만들어 먹은 지 꽤 되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나물 봉지(취나물 조금, 참나물 1킬로그램)를 냉장고에 일단 넣었다. 오전 시간을 빈둥대며 보내다가 동네에 새로 생긴 빵집에 가서 커피와 빵을 먹었다. 집에 오는 길에 친구에게 이따 나물을 먹으러 오라고 말했다. 유치원 차량이 도착하기 한 시간 전, 급히 취나물 된장국을 끓이고 취나물과 참나물을 섞어 겉절이를 무쳤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콩나물과 무를 넣어 콩나물밥을 준비했다. 딱 45분이 걸렸다.




덧.

그때 산 그 많은 나들은 다행히 한 줄기도 남기거나 버리지 않고 다 먹었다. 장하다.




#미루글방

#봄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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