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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May 10. 2022

나와 걷는다면

언제라도 봄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며 도로를 가득 채운 차들을 볼 때 나는 때때로 이상한 소외감을 느꼈다. 걷는 사람보다 차에 탄 운전자가 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려갈 때, 차가 없는 나는 차지할 자리가 없이 도로 귀퉁이 인도를 느릿느릿 걸어가는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운전자들의 세상이 저기 내 눈앞에 커다랗게 펼쳐져 있는데 영영 나는 그 세상을 모르는 걸까?

 그래서 나는 운전자가 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처음 줄넘기를 하게 되었을 때처럼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다. 운전을 하면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복잡한 사거리의 신호등과 무수한 도로표지판이 나에게 알려주는 정보를 이해하게 되었다. 초보운전자였지만 혼자서 두 시간이 넘도록 운전을 해서 시가와 친정에 어버이날 인사를 다녀왔다. 한껏 자신감이 생겨서 엄마와 여동생을 데리고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 처음 가 본 제주가 아름답기도 했지만, 내가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많이 감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남편의 차를 쓸 때마다 나의 일정보다 남편의 근무 시간표를 우선 고려해 차 쓸 날짜를 정해야 했고, 큰 선심을 쓰듯 차키를 내어주는 남편에게 빈정 상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나는 나에게 익숙한 뚜벅이로 지내기로 했다. 수업을 하고, 피아노를 배우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나는 매일 1시간 반씩 걸었다. 걸으면서 낯선 도시의 작은 동네에 적응하기로 했다. 외출할 일이 없을 때에도 일단 나가서 빵 한 봉지를 사서 돌아왔다. 나는 근사한 가로수와 화단이 있는 널찍한 인도를 매일 걸었다.

 비록 억지로 시작한 뚜벅이 생활이었지만 나는 걸어 다니는 나를 퍽 좋아하게 되었다. 다들 바쁜 현대인들이 차에 실려서 내달리는 6차선 도로변 인도에는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어른,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가끔 지나다닐 뿐, 적적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다. 밤늦은 시간만 아니면 춥든 덥든 걸었다. 팟캐스트 ‘지대넓얕’과 ‘빨간 책방’은 꾸준한 산책 친구가 되어주었다. 내가 좀 큰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와하하 호탕하게 웃어도 눈치 볼 일이 없었다. 그때그때 들리는 음악에 맞춰 빠르게 걷기도 하고 느릿느릿 걷기도 했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을 때 얼굴에 들이치는 바람을 맞으면 복잡한 상념들이 날아가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그러고 나면 머리 한구석의 깔끔해진 빈자리에 이런저런 공상과 아득한 꿈들을 한 포기씩 심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걷곤 했다.

 날이 따뜻해지고부터는 구석구석 심긴 꽃나무와 풀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나무와 꽃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했다. 동네 화단에는 남천과 조팝나무가 많았다. 쥐똥나무의 하얀 꽃은 향기가 짙었고, 행정복지센터 주변에는 키가 크게 자란 명자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4월이 되면 명자꽃과 영산홍이 새빨갛게 불타듯 피어났다. 동네 가로수는 온통 참나무와 이팝나무였다. 송화가루가 한창일 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폭죽처럼 피어난 꽃송이들을 보고 처음으로 이팝꽃이 예쁜 줄을 알았다. 여름이 되면 햇볕을 가릴 듯 무성해지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걸었고 곳곳에 두세 그루씩 모여 있는 배롱나무 꽃을 찾으며 한숨을 돌렸다. 가을에는 단풍잎과 은행잎의 변해가는 빛깔을 살펴보고 새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를 반갑게 맞았다. 사철나무의 반짝이는 붉은 열매와 레드커런트를 닮은 주목의 열매를 보면 발걸음을 멈추곤 했다. 겨울이 되어도 지지 않은 장미나 가장 늦게 떨어지는 단풍잎을 보면 꼭 다시 한번 눈길을 주고 파란 하늘과 앙상한 나뭇가지도 곱게 보이는 날이면 사진을 찍었다.

 혼자서 걸어 다니는 나는 좀 멋진 사람인 것 같다. 등허리를 곧게 펴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다리를 쭉쭉 뻗어 넓은 보폭으로 걷는 나는 운동하는 습관이 몸에 밴 강인한 사람. 빨리 걸으면서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핀 손톱만 한 꽃마리를 발견하는 사람. 어여쁜 꽃송이에 초점을 맞추려고 쭈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 날개 모양 단풍 열매를 잘 찍고 싶어서 까치발을 하고 팔을 쭉 뻗는 순간, 쨍하고 눈이 마주친 햇살이 마침 시작하는 곡의 바이올린 소리와 절묘하게 어울려서 감동하는 사람. 오늘 찍은 귀여운 꽃송이를 꼭 그림으로 남겨야지 결심하는 사람.

 오늘 오후에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병원과 친구 집에 다녀오느라 한참을 걸었다. 나처럼 초록색 풍경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하늘과 나뭇잎을 보라고 했더니 아이가 낮달을 찾아내고 기뻐했다. 유모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살랑거리는 상수리 나뭇가지 위로 하얀 반달이 조그마하게 찍혔다.


저기 작은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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