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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22. 2022

라일락을 그리는 시간

연보라색과 진초록색 사이


 봄 글방의 이번 과제는 마음에 쏙 들었다. 휴대폰 카메라 폴더에는 딸 사진보다 꽃나무 사진이 더 많은걸, 매일 걷는 길의 단풍나무 잎사귀가 볼 때마다 달라진다고 매번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걸. 7번이 뭐야, 매일매일 나는 내 꽃나무를 만나러 가서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려줄 건데? 그럴 리는 없지만 나의 라일락 나무는 나를 위해 마침 딱 한 줄기의 꽃봉오리를 마련해 놓았고, 내가 지루하지 않게 늘 다른 모습으로 맞아 주었다. 그리고 나는 딱 7번, 꽃을 만나러 갔다.

 꽃나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카메라를 들이밀며 혼자서 난리다. ‘왜 왼쪽으로 한 줄기만 꽃이 먼저 피는 거지? 이쪽에 해가 잘 들어와서? 꽃은 원래 더 보랏빛 아닌가? 원래 이렇게 회색빛이 나던가? 꽃봉오리는 자주색 튤립처럼 생겼네. 잎의 둘레에도 자주색이 보이네. 작년에는 꽃이 풍성했었는데 올해는 거의 없네.’


 바람이 세찬 오후에 꽃이 떨어졌을까 허둥지둥 찾아가 11개의 꽃송이를 세다가 하나가 모자라서 놀랐다. 줄기의 가장 안쪽에서 나무 중심을 향해 혼자 나팔 모양 꽃잎을 펼친 걸 보고 ‘너 뭐야, 놀랐잖아.’ 하며 나뭇잎을 들어 올리고 사진을 찍었다. 바빴던 날에는 멀리서 연보라색이 보이지 않아 깜짝 놀라며 헐레벌떡 뛰어가기도 했다. 축 처진 잎사귀들이 꽃송이를 가려 나무는 초록색으로 가득했다. 아니, 우듬지에 동그랗게 꽃대가 올라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어쩜 매일 달라지니.’ 꽃나무는 거기에 살기 시작한 날부터 저대로 꽃을 피우고 이파리를 내밀고 키도 키우고 있었는데 나 혼자 이랬다 저랬다 마음이 바쁘다.

 그림을 잘 그리라고 내는 숙제가 아니라고 선생님께서 분명히 공지하셨건만 나는 꽃 사진을 잔뜩 찍고 그중 한 장을 골라 잘 그리려고 애를 썼다. 라일락꽃은 형태를 잡기도 어렵고 채색하기도 어려웠다. 모양이 복잡한 부분은 그리지 않고 고운 색을 칠하면 더 예쁜 그림이 완성된다는 걸 알지만 ‘관찰일기’는 정확히 그리고 싶었다. 각자 다 다르게 생긴 꽃송이들의 크기와 모양을 가느다란 펜 선으로 꼭 그려내고 싶었고, 심지의 짙은 보라색과 꽃잎의 옅은 보라색을 곱게 칠해내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잎의 보드라운 초록과 꽃송이의 신비로운 연보라를 종이에 옮기려 할수록 색은 더 탁해졌다. 매사 디테일에 집착하고 생략을 어려워하는 성격이 페이지마다 드러났다. 꽃잎이 거의 다 가려졌던 날, 스케치를 하지 않고 붓에 초록 물감을 가득 발라 이파리를 쓱쓱 그리고 면봉만 한 꽃송이를 라일락색으로 그려 넣었더니 마음에 드는 그림이 되었다.


 좋아하는 걸 잘 그리고 싶을 때 그리기는 더 어려워진다. 애정을 담는다고 모든 일이 더 잘 풀리지도 않는다. 라일락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사랑을 듬뿍 퍼 주고 일기장에는 그 마음을 담으면 되는데, 실제와 더 닮게 그리지 못하는 꽃그림이 아쉽기만 했다. 팔레트에는 라일락, 바이올렛, 퍼플, 여러 보라색들이 흰색과 함께 어지럽게 섞여 갔다.

 마감날 관찰일기에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내일도 라일락을 보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는 이틀을 흘려보내고서야 겨우 기억이 나 꽃을 보러 갔다. 끝이 시들어가는 꽃송이가 보였다. 거기 그 자리에 늘 있는 꽃나무에게 호들갑을 떨며 찾아가서 말을 걸었다가 약속을 했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얄팍한 나의 애정. 아주 잠깐 들여다봐놓고는 실컷 다 봤다고, 너를 좀 알겠다고, 내 마음에 들였다고 해놓고는 뒤돌아서버린 무심함. 이런 마음도 모두 나 혼자서 난리다.

여섯 번째 라일락

#미루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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