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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Apr 17. 2022

연보랏빛

2주 동안 라일락을 지켜보면서



 꽃 관찰 일기 과제를 받고 겨울부터 만난 목련 나무가 반갑게 떠올랐다. 하지만 사다리를 들고나가도 가까이 보기 힘들 높이에 서너 송이 피어 있던 목련은 찬바람과 함께 내린 비로 거의 다 떨어졌다. 작년에 본 9동 앞 화단에 있던 작은 라일락 나무가 떠올랐다.


 3월부터 연보라색에 끌리고 있었다. 초록색과 밤색은 평생 마음을 주 색깔이었지만 연보라색을 향한 애정은 새로웠다. 동생이 만들어 준 팔레트에 있는 여러 가지 보랏빛 중에서 나를 사로잡은 빛깔은 이름도 ‘라일락’이다. 친구의 아들이 작년에 입었던 연보라색 옷이 떠올라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비눗방울을 터뜨리며 웃고 있는 아기를 그리고 라일락색을 듬뿍 칠해 그림을 완성했다.

관찰 첫 날


 휴대폰의 사진첩을 뒤져 꽃다발을 만지는 여름이 사진을 찾아 그렸다. 화병에 꽂힌 스톡꽃도 연보라, 여름이의 옷도 같은 색이었다. 라일락색과 샙그린색이 가득한 작은 그림을 바탕 화면으로 깔고 몇 번이나 액정 화면을 켜보았다.

사랑하는 아기와 꽃


 지켜볼 꽃을 라일락으로 정하고 떠오른 기억들이 있었다. 92년 어느 봄날, 옥상에서 소꿉놀이하던 친구 하나가 ‘라일락 뿌리 나를 잊어줘.’하며 불렀던 김종서의 노래 ‘지금은 알 수 없어’가 첫 번째 기억이다. 그런 가사가 어디 있냐고 누군가 따졌지만 아무도 영어 가사를 몰라 나중에는 다 같이 소리 높여 ‘라일락! 뿌리! 나를 잊어줘어어. 나는 그대에에 짐이 될 뿐이야아.’ 라고 열창했다. 내 나름대로는 ‘그대’라는 사람이 ‘라일락’인가 하며 가사를 이해하려 했는데 ‘my love, 부디 나를 잊어줘’라는 가사를 알고 멋쩍었던 순간은 한참 후에 왔다. 그리고 2주째 나는 ‘라일락 뿌리’를 부르고 있다. 아, 잊히지 않는 명곡이여!



 그다음은 중학교 1학년 때의 추억. 다니던 중학교의 건물 사이에는 꽃나무를 잘 가꾼 화단이 있었다. 햇빛이 찬란하던 봄날 오전, 국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너희들 현관 입구에 라일락 핀 것 봤어? 꽃향기가 정말 달콤하지? 그게 첫사랑이야. 그런데 라일락 이파리를 깨물어보면 어떤 맛이 나는 줄 아니? 그게 첫사랑의 맛이란다.” 친구들과 라일락 잎을 깨물고 에퉤퉤 쓴 침을 뱉으면서 결심했다. 저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는 국어 선생님이 되어야겠다고.


만개한 라일락


 세 번째는 16살 무렵의 기억이다. 동생들이 시골집에 갔거나 수학여행을 떠났는지 엄마와 단둘이 있던 밤, 밤공기조차 훈훈한 4월이었다. 9시가 넘은 시간에 엄마와 손을 잡고 산책하러 나갔다. 우리 집에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집에는 대문 밖 담장을 따라 일부러 자리를 내서 만든 듯한 화단이 있었다. 정성 들여 가꾼 작은 화단에는 키가 크고 꽃송이가 풍성한 라일락 나무가 있었다. 슈퍼마켓은 5분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지만 우리는 꽃향기를 맡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나는 손을 꼭 잡고 남은 손에 들린 달콤한 메로나를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둘이 있으니까 정말 좋다.”, “나도.”


숨었다


 즐거운 만큼 피로감 가득한 가족 모임이 끝난 오후, 짐가방 정리도 하지 않고 꽃나무를 보러 뛰어갔다. 따가운 햇볕에 어울리지 않는 세찬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11개의 작은 꽃송이는 그 자리에 잘 있었다. 라일락의 색은 라일락색 물감과는 달랐다. 중앙은 짙은 보라색이지만 꽃잎 가장자리는 흰색으로 보일 만큼 옅은 색이었다. 여러 각도로 꽃 사진을 찍었다. 꽃도 잎도 마구 흔들렸다. 흩어지는 향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기운을 차렸다. 들어가서 씻고 그림을 그리자.
 바람 소리가 담긴 꽃나무 동영상을 보며 라일락을 그려 본다. 며칠을 그려도 잡기 힘든 형태와 만들기 힘든 색에 살짝 한숨이 나온다. 마음속 라일락 이미지를 그리면 화사한 연보라색인데, 종이 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또 한 장 일기를 완성한다.


#미루글방

#봄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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