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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n 19. 2022

우리들의 여름밤

담뱃잎과 은하수



 한동안 밤을 잊고 지냈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 나에게 밤은 그저 전원을 끄고 충전하는 시간이 되었다. 근래에 들어 다시 나에게도 깨어있는 밤이 생겼지만, 보통 넷플릭스와 보내는 시간이라 특별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20년 정도 되돌아보았으나 해가 지면 술을 마시고 놀던 시절이 주르륵 떠올라 회상의 마무리는 반성이 될 뿐이었다. 여름밤은 바깥에서 술을 마시기에 참 좋았지. 맥주나 한 잔 마실까. 이런 식.
 맑은 느낌의 여름밤을 떠올리고 싶었다. 여름 방학을 좋아하던 시절의 밤은 어땠더라? 해가 지면 바람이 스산한 계절과는 다른 여름밤만의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 깜깜해도 밖으로 나설 수 있는 밤, 낮동안 이글대던 태양이 남겨놓은 열기로 대기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풀벌레와 개구리가 울고 풀과 나무는 검은 하늘 아래 깊은 초록색을 빛냈다.

 사람들이 담배 이파리 냄새를 알까? 흡연의 냄새가 아니라 싱싱한 담뱃잎을 말리는 냄새 말이다. 어릴 적 우리 시골 마을에는 담배밭이 많았다. 담뱃잎은 키가 어린애보다도 크게 자라고 꽃도 화려하다. 분꽃과 닮은 꽃송이가 높게 올라온 꽃대에 모여서 핀 꽃은 담배 말고 더 고운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여린 노랑과 분홍으로 피어난다. 그늘이 없는 밭에 심긴 담배는 줄기와 잎에 끈끈한 점액 같은 것이 묻어나고, 수확이 한여름이라 가장 힘든 농사 중 하나이다. 우리 집은 담배 농사를 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온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로 일을 돕곤 했었다. 농산물 건조기(다들 벌크라고 부른다)에 담배를 끼우는 작업은 주로 밤에 했다. 종일 일한 어른들이 고단할 새도 없이 밤늦도록 일하는 옆에서, 초등학생이던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늦은 밤에 밖에서 노는 것이 허락되는 귀한 날들이었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벌크 앞 공터에 어른들이 모여 일을 했다. 낮 동안 거둬들인 담뱃잎을 철봉보다 긴 건조봉에 차곡차곡 펼쳐서 거는 작업이었다. 담뱃잎이 솜바지 빨래처럼 기다란 봉을 벌크에 가득 채워 굽기 시작하면 잠시 새참 시간이 있었다. 어른들은 막걸리나 소주를 마시기도 했고 새참으로 옥수수나 감자, 수박을 먹기도 했다. 피곤에 절었어도 젊은 어른들은 쉴 새 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주 웃었다. 우리는 괜히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간식을 한 조각씩 얻어먹기도 했는데 그런 밤에 얻어먹는 수박은 유난히 달콤했다. 벌크에서 담뱃잎이 구워지면 구수하고 들큰한 냄새가 동네에 가득해졌다.
 일터 앞 다리에는 작은 산 모양으로 쌓아 올린 풀더미가 있었다. 거기에 불을 붙이면 잡풀과 겨 따위가 타오르면서 은근하고도 매캐한 연기를 풍기는 모깃불이 되는 거였다. 모깃불이 타오르는 동안 우리들은 기다란 쑥을 꺾어 연기가 더 올라오도록 풀썩풀썩 때리고, 작업장의 노란 불빛이 닿는 곳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밤늦도록 놀고 우리는 모기장 안에서 장난을 치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어른들은 깊이 잠들었고 나도 잠이 들까 말까 하던 순간,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재래식 화장실은 문을 닫으면 암흑이 되었다. 밤에는 문을 열고 용변을 봐도 되지만, 마당 수도를 밝히는 백열등의 노란빛은 화장실 안까지 닿지 않았다. 빨간 휴지, 파란 휴지 귀신은 무섭지 않았지만 나무 널빤지 사이의 어두운 공간에 발이라도 빠진다면! 소변이라면 대충 마당 구석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꼼짝없이 화장실에 가야 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널빤지에 쭈그려 앉은 동안 남동생이 손전등을 화장실 앞쪽에 비춰주기로 했다. 동그란 불빛을 얼굴에 비추었다가 마당에 비추었다가 빙빙 돌리며 장난을 치던 남동생이 탄성을 질렀다.
"누나야! 저것 봐라!"
여동생도 모기장을 들추고 마당으로 나왔다. 남동생이 가리킨 곳에 하얗게 반짝이는 길이 나 있었다. 검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하얀 길은 앞산 너머에서 뒷집 지붕 위까지 이어져 있었다. 은하수였다. 우리는 나란히 마당에 서서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히 많은 하얀 점들이 은빛으로 이어지는 별 무리를 보는 동안 신비로운 하늘로 빨려 들어갈 듯한 감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후에도 우리가 은하수를 본 적이 있었던가? 오늘 여동생에게 다 함께 은하수를 봤던 밤을 기억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시골에서 밤늦게 화장실 가려고 나올 때마다 본 것 같은데?”
그랬던가? 그랬을 것이다. 처음 몇 번은 은하수를 만날 때마다 기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감 해졌겠지. 누군가 은하수를 발견하고 나를 부르면 당연히 나가서 보았지만, 그 여름밤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여름밤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무심해지면서 어른이 되었다. 공원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여름밤의 낭만을 찾는 어른 말이다. 유치원 여름 방학 때 시골에 가면 내가 잊지 않고 은하수를 보러 마당에 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내 생일날 허블망원경 사진

<사진 출처>

Hubble Birthday

 https://imagine.gsfc.nasa.gov/hst_b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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