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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l 01. 2022

너에게 보내는 편지

이게 아마 400번 째쯤?

하루에게


 너는 내가 평생 가장 많은 편지를 쓴 사람이야. 고1 여름부터 일 년 동안 거의 매일 너에게 편지를 쓴 것 같아. 너는 어쩌다 한 번 답장할 뿐이었지만 상관없었어. 너는 나의 특별한 친구였으니까.


 우리 사이가 틀어진 날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 고2 가을, 영화 ‘러브레터’를 본 날이었어. 처음으로 내가 너와의 약속 시간에 늦은 날이었어. 그걸 꼬투리 잡아서 너는 나를 엄청나게 비난하기 시작했지. 너는 열 번도 넘게 늦었지만 나는 너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는데, 충격적이었어. 나는 기분이 상해서 너에게 맞서는 대신, 삐딱하게 영화를 욕했어. 그런 가슴 아픈 장면, 마음이 조마조마한 연출 따위 딱 질색이라고. 그랬더니 너는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어. 너 같은 바보는 처음 본다는 눈빛으로 영화를 볼 줄 모른다느니, 눈치가 없다느니 끝없이 못된 말들을 내뱉었어. 나는 왜 그렇게 멍청하게 네가 퍼붓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까?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였겠지?


 너는 다음 날 바로 나에게 사과를 했고 나는 그 사과를 받아들였어. 그리고 며칠 동안 노력을 했지만 마음속 깊이 상처가 생겼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 너의 눈을 바라보는 게 힘겨워져서 더는 너희 반에 가지 않았어. 금세 인사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지.


 고3 때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기억난다. 수능이 끝나 허탈하고 무료하던 시기였어. 너와 모른 체하고 지낸 지는 딱 1년쯤 되었을 거야. 아이보리색 바탕에 분홍색과 보라색의 옅은 꽃잎 무늬가 그려진 포장지를 한 줄 한 줄 잘라서 흰 종이에 붙인,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든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정성 가득한 편지였지. 나의 모든 취향을 만들어준 너를 잃고 싶지 않았어. 소중했던 너와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조용한 복도를 두리번거리면서 너의 레몬색 신발주머니에 그 편지를 넣었어. 매일매일 답장을 기다렸지만, 너는 대답하지 않았어. 어쩔 수 없이 나는 너를 잃어버렸어.


 이제야 말이지만, 너를 다시 한번 더 만나고 싶어서 애쓰다가 욱이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렸지 뭐니. 욱이는 내가 너에게 집착한다고 했어. 우리가 셋이든 넷이든 중심은 언제나 너였잖아. 나는 너 외에는 무리에 누가 있어도 상관없었어. 아마 욱이도 그랬을 거야.


어제 ‘우연과 상상’이라는 영화를 보다가 또 네 생각이 났어. 20여 년 만에 여고 동창을 만나는 이야기였어. 자연스럽게 동창회에서 너를 만나는 상상을 했지. 마흔의 너는 어떤 모습일까?


 너는 여름을 좋아했고, 일본 만화와 영화를 좋아했지. 늘 숏컷 머리에 스타킹 대신 아가일 무늬 반양말을 신었지. 생물 선생님과 문학 선생님에게 거침없는 질문을 던졌어. 수업 시간에 놀게 되면 벌떡 일어나서 장녹수를 불렀고, 수학여행 때는 무대에서 춤을 추었어. 너는 다정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어. 다른 아이들이 네 옆에 왔다가 질려서 떠나간 후에도 욱이와 나는 여전히 우리였어. 나는 소설 같은 너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다 믿었어.


 네가 한 수많은 거짓말들과 너의 거짓말 같은 죽음을 가끔 떠올려. 욱이의 전화로 너의 죽음을 듣던 여름밤이 생생하게 떠올라. 졸업을 하고 4년 만에 우리 셋이 만났던 날,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 “내가 너한테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나 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아니야. 네가 나쁜 게 아니었어.”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건 확실해. 이 편지를 너에게 전할 수 없다는 것도 확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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