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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그린 Jul 16. 2022

여름이 싫다고?

사실은 여름을 좋아해



  자우림의 노래 중에 ‘summerday blues’라는 곡이 있다. 눅진한 공기, 끈적한 촉감, 나른한 무기력을 버무리면 딱 나올 법한 음률과 가사의 노래다. 자우림의 시디를 사던 시절에도 좋아하는 곡은 아니었지만, 노랫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왠지 여름은 모두가 조금씩 미쳐. 비틀거리는 여름이 싫어. 등에는 땀만 나. 모든 게 짜증 나.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새파란 하늘과 미지근한 바람만. 내 옆엔 소리 없이 파리만 날리고.’ 김윤아가 야릇한 목소리로 흥얼거리듯 노래를 하고 배경에서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저씨들이 ‘더워, 더워라. 더워’를 반복하는 노래이다.

 예전에는 늘 여름이 싫었다. 그 시절에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름도 겨울만큼 싫었다. 추위는 껴입어서 막을 수 있지만, 더위는 벗어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온갖 것들이 잘 상하는 고온다습 날씨에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일은 아주 고역이다. 먹어서 배가 부른 것도 아닌데 껍질이 잔뜩 나오는 복숭아, 포도, 수박 등의 과일도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먹기 전부터 껍질 버리러 갈 일이 걱정이었다. 음식물 쓰레기통 근처에 가면 윙윙대는 파리들과 시큼하게 썩는 냄새가 진동하니까.

 덥다고 굶을 수 없으니 뭐라도 해 먹어야 하는 것도 여름이 제일 별로다. 대충 뜨거운 국물에 밥이나 말아먹으면 되는데, 국물 너무 뜨거워! 귀찮아서 라면을 끓이려고 해도 가스레인지 더워! 비빔면을 먹으면 되겠지만, 끓여서 헹구기 귀찮다! 그리고 비빔면은 한 개는 적고 두 개는 물린다고! 이런 이유로 냉면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복해서 먹다 보면 또 배탈이 난다. 더위에 배탈까지.

 여름에는 모기가 있다. 다행히 나는 모기에게 아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어쨌든 모기에게 물리긴 하고 물리면 가려운 건 누구나 똑같다. 모기를 떠올리면 꼭 떠오르는 만화가 있는데 이런 내용이다. 재앙처럼 거대한 모기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는다. 왜? 거대 모기가 사람의 피를 다 빨아먹으니까? 아니다. 모기에 물린 자리가 엄청나게 가려운 나머지 사람들은 물린 자리를 미친 듯이 긁다가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다. 모기향을 피우면 내가 더 어지럽고 살충제를 뿌리면 방 닦기가 더 고된 모기와의 싸움. 차라리 빨리 피를 먹고 가든지, 왜 미친 듯이 귓가를 맴돌며 나를 미치게 할까?

 무엇보다 여름이면 기승을 부리는 나의 무기력증. 평생 친구인 게으름과 그만큼 절친한 무기력은 더운 날씨에 피부처럼 달라붙었다. 씻자마자 다시 땀이 흐르는 날씨에 약속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다움마저 포기하고 방바닥에 들러붙었다. 해가 잘 들지 않아 덜 더운 집이었지만 대구의 한낮은 걸핏하면 37도, 땀을 흘려가며 시원한 방바닥을 찾아 꾸물꾸물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앉았다가 누웠다가 선풍기만 마주 보고 기나긴 낮을 흘려보내면 쉽게 울적해졌다. 기껏 의욕을 끌어모아 슬리퍼를 질질 끌고 밖으로 나서면 헤어드라이어에서 나온 듯한 바람이 얼굴에 훅 끼쳐온다. 한숨도 그 바람만큼 뜨거운 계절, 역시 여름은 뭔가 좀 미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런 날에는 이상의 수필 ‘권태’를 읽으며 무료한 감각에 한껏 빠져들어 낮부터 맥주를 마시기 마련.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런 문장을 읽으며 맥주나 마시면서 시간을 좀 낭비해볼까. 그리고 또 하염없이 뒹굴뒹굴.

 이런 식으로 보내던 여름은 벌써 지나간 지 오래다. 입시학원의 노동 착취 현장을 분연히 떨치고 나온 7월이었다. 일을 그만두자마자 불안감이 밀려와 텔레비전까지 들어내서 싹싹 청소하고 매일 강사 구인란을 살펴보면서도 한없이 늘어지는 시간. 혼자 텅 빈 집에 앉아 ‘사랑과 전쟁’ 재방송을 보며 화면을 향해 삿대질하고, 글을 좀 써볼까 싶어 컴퓨터를 켰다가 ‘초속 5cm’를 보며 엉엉 울기가 일상이었다.

 밤은 좀 나았다. 각자 일상을 마치고 돌아온 동생들과 세숫대야에 찬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엑스파일’을 보는 시간은 짜릿했다. 셋이 돌아가며 게임을 하다가 동생들마저 잠들고 나면, 깊은 새벽 공기에 혼자만의 감성에 젖어 팬픽 나부랭이를 끄적끄적하는 시간이 있었다. 손발 끝이 오그라드는 유치한 이야기지만 모니터 저편의 친구와 깔깔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름을 싫어하는 친구와 매일 가을을 기다렸다. ‘지금은 너무 더우니까 뭘 집중해서 할 수가 없어. 가을이 되면 운동을 할 거야. 가을이 되면 책을 읽고 글도 쓸 거야.’ 지키지 않을 다짐을 다음 계절로 미루면서.

 그렇게 싫어했던 계절이었건만, 언제부턴가 나는 여름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서 해가 바뀌는 게 무겁게 느껴져 그럴 수도 있고, 덥다고 누워있을 여유는 없는 엄마가 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여름이 좋아졌다. 생기가 넘치고 색채가 풍부한 여름, 종일 무언가를 해도 밤이 늦게 찾아오는 여름, 옷차림이 가벼운 만큼 몸도 가벼워지는 여름, 다정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마음이 느긋해지는 여름.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렇나. 하루 온종일 저 푸른빛은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이상이 지긋지긋하다고 한 퍼렇고 푸른 여름이 되면 나는 힘이 솟는다. 머리 위를 빽빽하게 채우는 나뭇잎들, 먼 하늘에 솟아나는 뭉게구름들과 긴 저녁 시간 유난히 아름다운 노을까지.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들이다. 물론, 창문으로 내다볼 때의 이야기이고 뙤약볕 아래에 걷는 건 에어컨에 식은 몸을 데우는 3분까지.



#미루글방 #여름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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